첼로의 처음과 끝을 꿰고 있는 연주자가 있다. 독일 출신의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68)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보다도 앞서는 가장 오래된 첼로 독주곡으로 꼽히는 17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도메니코 가브리엘리 등의 작품을 발굴해서 음반으로 녹음한 주인공이다. 첼로 연주자에게는 파가니니처럼 중요한 작곡가인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전곡(12곡)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녹음한 음반도 “기념비적”(영국 전문지 그라모폰)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흡사 첼로의 고고학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존 케이지와 윤이상의 현대음악도 즐겨 연주하고 녹음한다. 첼로의 400여 년 역사가 그의 활 끝에서 모두 흘러나오는 셈이다.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음악 감독 김민)와의 협연을 위해 내한한 그는 15일 인터뷰에서 “흔히 바흐의 고음악과 존 케이지의 현대음악을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내적인 성찰과 영혼의 정화, 고요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라는 점에서는 하나로 통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첼로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녹음하면서도 중간중간에 존 케이지의 작품들을 넣었다.
이번에는 그가 시인이자 수필가, 사진 작가로 변모했다. 그가 쓴 시와 수필, 촬영한 사진들을 모은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풍월당)가 최근 국내 출간된 것. 번역을 맡은 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씨의 서문처럼 “그의 글에는 MSG(인공 조미료)가 없었다. 재미를 주려고 이리저리 꾸민 말이 없었다. 그의 어투는 진솔하고 담백하여 마치 듬직한 독일 나무 한 그루가 말하는 것” 같은 매력이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전설적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의 5주기 기일을 맞아서 낭독했던 추모사, 동료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75)의 음악상 수상을 축하하는 연설, 프랑스 명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를 위해서 쓴 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악 연주자들은 평소 현(絃)과 활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감정과 의사를 드러낼 뿐, 말과 글을 직접 접할 기회는 드물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베르거는 “10대 시절부터 언제나 백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시구(詩句)나 구절이 있으면 적는 버릇을 들였다. 그 결과물들을 뒤늦게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베르거의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어(詩語)는 책의 독일어 원제인 ‘이슬방울(Tautropfen)’이다. 그는 잠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방울을 응시하면서 “저 수수께끼같이 푸르른 위안/저 명멸의 별빛/저 숱한 십자가 죽음의 불꽃”이라고 노래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슬방울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이어주고, 거울처럼 산과 자연을 모두 비춰준다.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이슬방울 하나를 통해서도 배운다”고 말했다.
베르거 역시 40년 전에 28세의 나이로 당시 독일 최연소 음대 교수(뷔르츠부르크 음대)에 임용되면서 유럽 음악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한국 젊은 연주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을 묻자 그는 “한국 연주자들은 기량이나 실력에서는 부족한 점이 없다. 다만 프랑스 혁명을 모르고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고, 독일 개신교에 대한 이해 없이 바흐를 연주할 수는 없다. 음악은 문학과 역사, 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