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호명된 남명렬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나도 배우를 계속해야 하는지 숱하게 고민했다”며 “삶은 생각보다 길다. 당장은 힘들어도 자신을 믿고 멀리 보며 견디는 게 결국 승리하는 길”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얘가, 배우가 되겠냐?”

남명렬(63)은 이 질문을 화두처럼 붙잡고 살았다. 6년 다닌 일동제약에 사표를 내고 대전에서 연극을 하다 서울로 올라온 1993년이었다. 산울림소극장 1층 카페에서 연출가 임영웅이 연극 ‘불의 가면’ 주인공으로 그를 캐스팅한 연출가 채윤일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얘가, 배우가 되겠냐?’가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 그날부터 내 삶은 배우로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었다.”

제32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로 호명된 남명렬은 “원망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난 30년 동안 저 말을 새겼다”고 했다. 남자 배우의 수상은 11년 만이다. 남명렬이 인터뷰 장소로 고른 곳은, 아니나 다를까, 산울림소극장 1층 카페. 그는 “임영웅 선생의 스승인 이해랑 선생의 성함을 딴 연극상을 받다니, 이제야 저 질문에 ‘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여러 작품에서 함께한 배우들과 영감을 주고받은 연출가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떠받쳐준 스태프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서울 홍대 앞 산울림소극장 1층 카페에서 만난 남명렬 /장련성 기자

-수상 소식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어머니다. 아들이 연극을 하겠다며 모든 걸 내팽개쳤으니 걱정이 태산이셨을 거다. 자식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다 몇 년 전 황망히 돌아가셨다.”

-이해랑 선생과는 면식이 없겠다.

“먼 발치에서 신화처럼 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상이라 한동안 마음속으로 꿈을 꿨다. 후배들이 받으면서부터 ‘나는 아니겠구나’ 했는데 통보를 받고 놀랐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됐다.”

-남명렬은 어떤 배우인가.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버텨낸 사람이다.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연극계에서 나는 주류의 삶을 살지 않았다. 연극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지방에서 불쑥 올라온 배우였으니까. 나는 생존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고 30년을 잘 버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주류로 살아온 배우도 이렇게 이해랑연극상을 받을 수 있다.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배가 된 것 같아 기쁘다.”

배우 남명렬(오른쪽)이 최근 대학로에서 공연한 연극 '질투'. 왼쪽은 배우 이호재. /컬티즌

-오랫동안 외로웠겠다.

“서울 생활 초기에는 그야말로 나 혼자였다. 지연, 혈연, 학연, 아무것도 없었다. 막막했다. 오로지 내가 맡은 배역을 얼마나 구현하느냐에 따라 살 길이 열리거나 닫히는 삶이었다. 나의 동아줄은 나 자신이었다.”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웠나.

“배우는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다. 다음 작업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형벌이었다. 몇 달 동안 빈둥거리다 돈이 떨어지면 정말 힘들었다. 퇴직금? 커피숍을 냈다가 말아먹었다. 버티고 기회를 살리면서 작업과 작업 사이에 쉬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연극 ‘바다와 양산’ ‘코펜하겐’ ‘그을린 사랑’ 등 140여 편에서 진지하고 매끄럽게 인물을 창조했다. 지식인 전문 배우라는 평도 받는데.

“김아라 연출과 ‘이디푸스와의 여행’을 하며 시야가 트였다. 배우가 자기 배역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믿지 않으면 관객은 절대 믿지 않는다. ‘이디푸스와의 여행’ ‘불의 가면’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누가 누구?’ 등 4편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토대 같은 연극이다. 지나온 배역의 60%는 지식인이었다. 공감을 얻기 위해 늘 노력한다. 내 안에서 무엇이 더 나올지 나도 모른다(웃음).”

제32회 이해랑연극상을 받는 배우 남명렬 /장련성 기자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나.

“2002년 영희연극상 수상 소감으로 ‘상을 받기 위해 연극을 하진 않지만 이 상이 배우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고 말했다. 연기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팔의 힘만으로 외줄을 잡고 오르는 것과 같다. 끝이 보이지 않고 안전장치도 없다. 그 외줄 중간에 매듭이 있다면 잠깐이라도 다리를 쉴 수 있는데 상이 그런 것이다. 이번 수상으로 더 올라갈 힘을 얻었다.”

-연극만의 매력은.

“영상은 편집의 예술이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다. 배우는 등장하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노출된다. 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준비한다. 라이브라 더 긴장되고 실수도 하지만 그 또한 매력의 일부다. 영상이야 다시 찍으면 되지만 연극은 실수마저 금방 과거가 돼버린다. 인생처럼 그저 흘러갈 뿐이다.”

말이 청산유수였다. 수상 이후의 각오를 묻자 남명렬은 “부족한 재능을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메워왔다”며 “앞으로도 자만하지 않고 연극을 잘 섬기며 배우의 길로 매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