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악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국계 네덜란드 하피스트인 라비니아 마이어(39)는 이런 고정관념에 과감히 도전하는 연주자다. 최근 방한한 마이어는 지난 8일 인터뷰에서 “바이올린처럼 악단 동료들과 함께 연주하는 다른 악기들과 달리, 하프는 오케스트라에서도 홀로 떨어져서 다음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적이 적지 않다”면서 “그래서 단원들 속에서도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는 악기”라고 말했다.
단원 생활 대신에 솔로 활동을 결심한 그는 올해까지 벌써 10장의 하프 음반을 발표했다. 하프 독주자로 활동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세계적으로 10장의 하프 독집을 펴낸 경우는 희귀한 경우다. 최근 그는 자작곡을 담은 10번째 음반 발표를 기념해서 방한했다. 음반 제목은 ‘아직도 어딘가 있나요(Are you still somewhere)?’.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팬데믹 기간 중에 음악인들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을 담았다. 그는 “코로나 사태 이후 수개월씩 공연장이 폐쇄되고 관객들과 만나지 못하면서 고립감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마이어는 네덜란드의 요양원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공연하거나, 야외 공원이나 광장에 앰프를 설치하고 동네 이웃들에게 하프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마이어는 14세 때인 1997년 네덜란드 하프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일찍 재능을 드러냈다. 2000년 브뤼셀 국제 하프 콩쿠르와 2004년 네덜란드 콩쿠르에서도 우승한 뒤 200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데뷔하며 세계적 하프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보듬어 안는 것처럼 연주하는 자세와 손끝에서 빚어지는 소리에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하프의 매력”이라며 “내게 하프의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보다 더 순수하게 들린다”고 말했다.
마이어는 바로크부터 낭만주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현대음악과 팝, 재즈와 무용까지 다양한 장르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니멀리즘의 거장인 미국 작곡가 필립 글래스와 두 차례 음반 작업을 했고, 이번 음반에서는 세계적 록 스타 이기 팝이 낭송한 자작시에 맞춰 하프를 연주했다. 그는 “음악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내게 다양성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에는 직접 편곡한 아리랑 변주곡으로 디지털 싱글도 펴냈다. 마이어는 “하프와 닮은 가야금도 배워 보았는데, 아직 능숙하게 연주할 만한 실력은 아니다”라며 웃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세 살 연상의 친오빠와 함께 네덜란드 가정에 입양됐다. 직업 소개사인 양아버지와 회계사인 양어머니는 첫 딸을 낳고서도 이들 한국인 남매를 입양했고, 그 뒤에도 마이어보다 두 살 아래의 에티오피아 출신 남동생을 다시 입양했다. ‘유럽계 친딸, 아시아계 남매, 아프리카 출신의 남동생’의 다문화 가정인 셈이다. 마이어는 “지금 큰언니는 변호사, 오빠는 웹 디자이너로 일하고 남동생은 어머니의 일을 돕고 있다. 집안에서 나 혼자 음악가인 셈”이라며 웃었다. 2009년 첫 내한 연주회 직후 친아버지와도 만났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는 “이전까지 한국은 머릿속에 존재하는 나라였다면 지금은 가슴속에 있다. 그 뿌리 덕분에 내가 음악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