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사각 거울인 줄 알았는데 ‘영상 벽’이었다. 거울과 거울 닮은 스크린을 교차해 배치한 방은 어느 새 미로다. 이탈리아 피렌체성에 있는 프레스코화는 영상 속에서 마치 자가 증식하듯 수를 늘려가고, 그 영상 속에서 나른하게 춤추는 젊은이들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억새 사이로 찬란하게 이어진 푸른 숲. 20세기 영국 작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 ‘전망 좋은 방’의 한 장면 속에 서 있는 듯하다.
수백 벌의 ‘옷’이 전시된 건 아니지만 그 느낌 자체로 의상인 전시. 4일부터 오는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 박물관에서 무료로 열리는 ‘구찌 가든 아키타이프(Archetypes): 절대적 전형’이다. 지난 2015년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총괄 디자이너)로 임명된 알레산드로 미켈레(50)가 이 전시의 처음이자 끝이다. 미켈레는 부임 이후 구찌를 2030 젊은 층이 구애하는 ‘핫(hot)’한 브랜드로 바꿔놓았다. 그 덕에 21세기 가장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미켈레 창작의 원천에 대한 영상·음악·설치 미술을 멀티미디어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패션쇼와 광고 캠페인이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를 13개의 방에 담았다.
그의 패션쇼를 달달 외우고 있는 마니아들에겐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를 주지만,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다. 이탈리아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키비오 페르소날레의 내부 디자인으로 구획된 공간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예술이다.
만화경(萬華鏡) 같은 그의 눈은 창세기 노아의 방주를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 흑인 인권 운동의 정신을 담은 1960년대 소울(soul) 음악, 젊은 층의 저항과 반전(反戰)의 상징인 프랑스 68혁명, 이 시대 청년 문화의 성지가 된 베를린 클럽 어딘가를 지나 영화 ‘혹성탈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속 유인원과 우주선을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스페인 현대 예술가 이그나시 몬레알이 900시간 걸려 그린 벽화는 신화적 존재들, 16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라파엘 전파(前派)풍의 그림이 섞여있다. 압도적이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인 듯 ‘포스트잇’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gucci1234′. 구찌 본사 와이파이(wifi) 비밀번호다. 베를린 클럽의 새빨간 화장실 문 밑틈으로 살짝 보이는 구두 두 켤레. 굽이 15cm는 됨 직한 펌프스(끈이나 고리 없이 발등이 깊이 파진 여성용 구두)와 굽 3cm 정도 로퍼다. 구두 주인의 발목까지만 보인다. 성별도, 무얼 하는지도 상상에 맡길 뿐. 코로나 거리 두기 상황에서 미켈레는 사람들의 숨결을 찾길 원했다. 지하철 플랫폼은 현대인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미켈레는 이를 ‘생각의 동굴’이라 불렀다. 지하철이 ‘지옥철’이 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선 휴식도 취하고 공상을 펼치기도 하니까.
그의 ‘희망적 메시지’는 68혁명 구호의 재해석에서도 확인된다. 국내 그라피티 아티스트 범민과 협업한 이번 작품에서 미켈레는 저항(rebelle)을 re-belle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 Belle은 프랑스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는 ‘낙관론을 선택하라’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려라’ 같은 구호로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