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세션‘을 연습 중인 배우 신구는 “다시 도전할 욕심이 샘솟은 연극”이라고 했다. /파크컴퍼니

지난 30일 오후 대학로 한 연습실. 문을 열자 1939년 9월 3일 런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신구)의 서재가 펼쳐졌다. 연극 ‘라스트 세션 (Freud’s Last Session)’은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대국민 담화가 예고된 이날, 작가이자 옥스퍼드대 교수 C S 루이스(이상윤)가 프로이트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신은 존재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고, 박사님 주장처럼 신을 믿는 인간들이 ‘강박신경증’을 앓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이상윤)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제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 생각만 옳고, 자기들이 통제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게 되지.”(신구)

과학을 믿는 무신론자와 계시를 믿는 유신론자는 만나자마자 검투사처럼 치열하게 싸운다. 말과 논리로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이 연극이 “올림픽 펜싱 경기 같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 마침 라디오에서 체임벌린 수상이 독일과 전면전을 선포하며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 냉소한다. “당신의 그 하나님에게 감사드려야겠소. 나에겐 암(구강암)이라는 축복을 내려준 덕분에 또 다른 전쟁은 겪지 않아도 되니.”

배우 오영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후 들떠 있는 나를 누르고 싶어 선택한 연극”이라고 했다. /파크컴퍼니

같은 시각, 도보로 5분 거리인 다른 연습실에선 배우 오영수(프로이트)와 전박찬(루이스)이 논쟁 중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 번호 1번 오일남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오영수는 칼처럼 날이 서 있었다. 루이스가 “역사는 괴물들로 가득 차 있죠.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남았고요”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 “또 다른 괴물들을 맞아들이려고 살아남은 거지. 인간들은 적 없이는 살 수 없어. 공기만큼이나 적을 필요로 하지.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가장 큰 동맹은 항상 신이었소”라고 반박한다. 루이스는 “히틀러라는 악이 오히려 선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재반박한다.

미국 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쓰고 오경택이 연출하는 2인극 ‘라스트 세션’은 신구(86)와 오영수(78)가 프로이트를 나눠 맡는다. 신구는 이순재와 함께 노역 연기의 투톱이고 오영수는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 전박찬은 “두 분을 겪어 보니 톤이 다르다. 신구 선생님은 빠르고 오영수 선생님은 날카롭다”며 “오영수 선생님과 연기할 땐 ‘지지 말아야지’라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고 했다. 이날 가장 안정감을 준 배우는 이상윤이었다.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프로이트를 연기할 신구와 오영수, 루이스를 연기할 이상윤과 전박찬. 네 배우가 지난달 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구와 이상윤은 2020년 초연 멤버다. /뉴시스

바깥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배우들은 절정을 향해 끓어올랐다.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지적 논쟁은 아니었다. 위트가 넘치는 연극이었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대표하지만, 공습 사이렌을 듣고 바닥에 엎드려 허겁지겁 방독면을 쓸 땐 똑같은 인간이었다. “우리들 뇌는 공포만 붙들고 있을 순 없어요. 그럼 아무것도 못 해. 농담이든 다른 생각이든 해서 떨쳐 버리고 나아가야 돼요”(프로이트)라는 대사는 어둡고 긴 코로나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복음처럼 들렸다.

공연은 오는 7일 대학로 TOM 1관에서 개막한다. 배우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무신론도 유신론도 아니고 연기에 대한 확신. 이날 연습이 끝나고 오영수는 “신구 형님이 한다기에 참여했는데 ‘리어왕’ ‘파우스트’보다 힘들어 위기감을 느낀다”며 “골든글로브 수상 통보가 와도 시상식(미국 시각 1월 9일)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60년 전 호랑이 해에 데뷔한 ‘깐부’ 신구가 빙긋이 웃었다. “나는 2020년 초연 때 미진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이번엔 재연이라 더 잘해야 하니까 불안해. 동생 없으면 내가 하면 되지. 암말 말고 다녀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영롱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