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 2022 봄여름 원피스 의상. 페트병을 분해한 섬유에 박윤희 디자이너 특유의 프린트를 찍었다. /서울패션위크

패션계에서도 이제 ‘용기 내’야 뜬다. 언뜻 들으면 당연해 보인다. ‘패셔너블’은 계절과 통념 등 기존 상식을 비틀고 뛰어넘는 용기를 내야 어울리는 표현이니까. 여름에 땀띠가 나건 말건 겹쳐 입고 껴입어야 ‘멋지다’는 취급을 받고, 겨울엔 동상 일보 직전까지 안 입고 버텨야 ‘패션 좀 안다’는 소리를 들었던 세상이었다.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e·보디 포지티브)가 유행하면서 몸매와 상관없이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가령 팝 가수 빌리 아일리시.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든, 숨 막힐 것 같은 코르셋으로 섹시미를 과시하든 내키는 대로 입고 대중은 찬사를 보냈다. 이게 바로 패션계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용기(勇氣)다. 편견에 역행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거나.

이성동 디자이너 ‘얼킨’ 2022 봄여름 의상. 모두 재활용 원단으로, 신진 아티스트들의 버려지는 습작을 이용해 디자인했다. /서울패션위크

하지만 이번 ‘용기’는 조금 다르다. 마트나 재래시장에 갈 때 장바구니를 반드시 챙겨가는 이들이라면, 커피 전문점에서 1회용 종이컵 대신 자신의 컵이나 텀블러를 내본 이들이라면 바로 끄덕일 것이다. 여기서의 용기는 바로 그 용기(容器)다. 지난해 배우 류준열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대형 마트에서 생선을 구입한 뒤 집에 있던 용기에 담아 ‘용기 내 보았다’라고 올렸다. 여기에 ‘#용기내’라고 해시태그를 붙이자 ‘용기 내’ 챌린지가 젊은 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국제 환경 단체인 그린피스를 후원하고 있는 류준열의 재치에 많은 이가 박수를 보낸 것이다. ‘용기 내 챌린지’는 그린피스에서 시작한 캠페인으로 생활 속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운동의 확장판. 기후위기 등에 맞서 전 지구적인 활동으로 확대되고 있는 제로 웨이스트는 플라스틱 줄이기, 재활용 업사이클(폐기물을 이용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 해양 쓰레기 재활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건타이거의 선인장으로 만든 가죽 재킷/서울패션위크 제공

이젠 그 ‘용기’를 온몸으로 자랑할 수 있다. 다음 달 7일부터 15일까지 7일간 디지털로 열리는 2022 봄여름 서울패션위크에선 재활용 소재나 버려진 원단, 폐플라스틱 섬유 등을 이용한 디자이너들을 대거 무대에 세웠다. 해외에서 재고 원단(deadstock)으로 만든 의류가 2030 젊은 세대에 큰 인기를 끌고는 있지만 이렇게 컬렉션 무대 메인 주제로 채운 건 처음이다. 블랙핑크 로제 등이 착용해 화제가 된 양윤아 디자이너의 비건 타이거는 이름처럼 생명을 착취해 생산된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디자인하는 국내 최초 브랜드. 한지나 선인장으로 가죽 같은 느낌의 원단을 제작한다. 고태용 디자이너의 비욘드 클로짓도 선인장, 버섯 원료를 이용한 비건 레더(식물성 가죽)를 선보인다.

재고 원단을 재활용해 멋스러운 패션으로 재탄생시킨 홀리넘버세븐/서울패션위크

최근 뉴욕패션위크에 진출한 이성동 디자이너의 브랜드 얼킨은 버려지는 회화 작품으로 의류와 잡화를 제작한다. 제품 수익의 일부를 로열티로 제공해 미술 재료를 지원하거나 전시 기회를 주는 등 신진 작가들이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최경호, 송현희 디자이너의 홀리넘버세븐은 재고 원단을 이용하고, 최충훈 디자이너의 두칸은 독특한 염색 방식으로 환경 오염을 최소화했다. 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는 페트병을 분해해 제작한 친환경 재활용 실에 프린트를 찍어 다양한 아이템을 제작한다. 미국 W매거진은 최근 “수년 전만 하더라도 폐섬유나 재고, 인조털 등으로 럭셔리한 의상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는데 지금은 사회적 요구와 소비자 욕구가 맞아떨어지고 있다”면서 “앞으로 더욱 이러한 트렌드는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용기내

용기내 캠페인은 일회용품 줄이기 운동 중 하나로, 가정 내 다회용 용기(容器)를 들고 가 플라스틱 봉투 등 일회용품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릇을 뜻하는 용기와 씩씩한 기운을 나타내는 용기(勇氣)를 연상케 하는 언어유희를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