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서이숙(가운데)과 배종옥(오른쪽)이 귀신을 연기하는 연극 ‘분장실’. /T2N미디어

안톤 체호프가 쓴 연극 ‘갈매기’를 공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 배우 A(서이숙)와 B(배종옥)는 거울을 보며 분장에 여념이 없다. 여주인공 니나를 연기하는 배우 C(우정원)가 들어와 담배를 피우며 독백을 연습하고 나간다. A와 B가 혀를 찬다. “대사가 어지간히 입에 안 붙나 보다.” “이제 키스 장면인데 트리고린이 좋아라 하겠네”···.

관객은 곧 알게 된다. A와 B는 귀신이다. 프롬프터(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 생활을 오래 한 A는 무대에 오를 땐 대개 남자 역을 맡아 여자 역에 대한 로망이 있다. 지방 출신으로 외모에 자신감이 있는 B는 욕망하던 니나를 연기하지 못하고 숨졌다. 죽어서도 무대와 분장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이들은 ‘맥베스’ 등 고전의 주요 배역을 연기하며 그 장소를 떠돈다.

연극 ‘분장실’(연출 신경수)은 일본 현대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이다. 이번 공연은 원작에 없는 ‘세자매’와 ‘고도를 기다리며’를 추가했다. 고단한 시대를 견디려면 기다림과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이라 잘 어울리는 위로로 다가왔다. 적절한 애드리브를 섞는 ‘진지한 귀신’ 서이숙과 ‘발랄한 귀신’ 배종옥 등 배우 앙상블도 믿음직스러웠다.

‘갈매기’ 속 인물들은 모두 불만투성이다. 사랑과 증오, 질투와 단념, 꿈과 좌절. 그들 모두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하다. 갈매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연극을 보는 관객은 속절없이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갈매기’를 떠올리게 된다. 못 가져서 괴로워하는 사람, 가지고도 더 가지려는 사람, 죽어서도 발버둥치는 사람 등 우리가 사는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

체호프는 비극적 상황에서 희극성을 발견한 작가다. ‘웃긴 비극’이다. 삶은 시작과 끝이 있는 비극이라서 웃음이 필요하다. 이 연극에서도 웃음은 샴페인 거품처럼 올라왔다가 사라진다. 공연은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 19일부터는 같은 무대에서 여성을 모두 남성으로 바꾼 ‘분장실’ 남자 버전(각색·연출 오세혁)이 이어진다.

연극 '분장실'의 한 장면. /T2N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