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2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4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5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바늘과 가죽의 시(詩)’(구병모), ‘자본주의의 적’(정지아)입니다.

'바늘과 가죽의 시' 소설가 구병모/현대문학
'자본주의의 적' 소설가 정지아/창비

다음은 2021년 동인문학상 6월 독회 심사평 전문.


◇김인환·문학평론가

김인환 문학평론가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정지아의 소설은 역사와 수필을 두 개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의 주위를 돌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겪은 이야기이고 수필은 내가 겪은 이야기이다. 역사 쪽으로 가면 어두워지고 수필 쪽으로 가면 밝아지는 데 정지아 소설의 특색이 있다. 모두가 읽고 쓰고 술 마시고 데모하는 데 여념이 없던 문창과 시절에 “너무 묽어져서 곧 맑은 물 같은 것으로나 변할 것 같은 그런”(12쪽) 친구가 있었다. 낯선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 친구에게는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불안을 내비치지 않고 남들 하는 대로 희미하게 따라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존재를 지우는 비기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 화자의 강권에 잠시 몸담았던 운동단체 출판팀에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대학을 나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현장에 들어가서 운동은 그만두고 그냥 노동자가 된 남자였다. 집에서는 습관처럼 『자본론』을 읽지만 세상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사는 그의 생활능력이 의심스러워 걱정하는 화자에게 친구는 알아서 살 거니 참견 말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연봉 삼천오백에 친가와 시댁에 매달 오십씩 해마다 천이백을 보내고 이십 평 아파트에서 부부는 두 아이와 함께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산다. 차는 무서워서 못 몰고 여행은 꿈도 안 꾸고 책은 도서관에서 읽는다. 그녀에게는 욕망이 없으니 좌절도 없다. 화자가 소설을 보내면 뭘 그렇게 써대냐고 나무라는 그녀를 화자는 “도무지 멈출 수 없는 우리 불온한 인류의 쉼표”(44쪽)라고 부른다. K읍 원어민 교사 스텔라는 조지아주 애틀랜타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 옆 마을에 있는 작은 대학을 나왔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 빌린 학자금을 아르바이트로 갚다 보니 어느새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155쪽). 비행기 표를 사서 돌아가면 두어 달 치 월급 정도의 현금밖에 남이 있지 않을 것이지만 그녀는 뼈 빠지게 일해도 더 가난해지는 아버지의 땅콩 농장으로 돌아가 은행에 저당 잡힌 인생을 사느니 “지금처럼 달라질 것도 나아질 것도 없는 인생을 사는 편이 낫다(147쪽)”고 생각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섬진강변의 “숨 막히도록 황홀한 봄밤”(160쪽)에 카페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면서 그녀는 “평생을 인생이라는 것의 밖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158쪽)고 스스로 자신을 달랜다. 남부군 전투사령관 박종하를 따라 지리산에 들어가 있다가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박종하의 친구와 결혼하여 얻은 딸 하나를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로 삼고 살아온 노파가 아흔아홉 해의 생애를 돌아보는 「검은 방」에는 역사가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치매에 걸린 남편 수발 삼 년에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골다공증을 얻었고 척추협착증이 악화된 노파는 십삼 년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혈압과 당뇨가 안정되었고 신경마비 시술을 받아 척추의 통증도 완화되었다. 젊은 시절 평등한 통일 조국을 신앙하던 노파의 세상은 이제 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딸의 일상이 사소하게 흔들리면 그녀의 삶에서는 우주가 흔들린다”(89쪽). 남편의 형은 아홉 살 때 아버지와 동네 장정들이 국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본 후로 종일 허공을 보며 됫병 소주를 끼고 살다가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위암 수술을 한 큰 집 조카가 또 술을 끊지 못하여 죽게 되었다. 딸이 안기부에 쫓겨 다닐 때 이 조카가 담낭암에 걸린 노파를 지켜주었다. 딸이 막노동을 하는 그에게 노동문제에 대해 말을 건네면 그는 노가다가 일할 데도 많고 일당도 괜찮으니 내 걱정 말고 작은어머니한테나 신경 쓰라고 누나를 나무라곤 했다. 술을 안 먹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조카에게 인생이란 원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며 노파는 술을 내준다, 예전에 시숙이 술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맬 때도 노파가 술상을 차려 주었었다. 역사와 수필이 겪은 이야기라면 소설은 지은 이야기이다. 역사가 보편성을 추구하고 수필이 개별성을 추구한다면 소설은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다. 소설의 인물은 개별적인 인간인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이다. 겪은 이야기는 보편성이나 개별성의 어느 한 쪽을 드러내지만 지은 이야기는 보편과 개별을 하나로 묶는 보편적 개성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작가가 앞으로 허구의 힘을 좀 더 많이 신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주기를 희망한다.


◊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구병모의 『바늘과 가죽의 시』는 한 편의 긴 환상시와 같은 소설이다. 호메로스 시절부터 근대 어름까지 구두를 만들던 사람들이 있었다. 명상과 집중으로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그들은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다른 일을 택하거나 다른 생을 택하여 흩어졌고 지금은 한국에 이안과 미아만이 남아 있다. 피가 흐르는 그들의 삶도 영원은 아니겠지만 이안과 미아는 수천 년을 살아남았다. 가죽뿐 아니라 연모까지 제 손으로 만들어 쓰는 갖바치 이안은 구두의 모양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도 구두를 만드는 방법을 바꾸지 않는다. 일용할 기계가 일용할 양식보다 더 중요하게 된 시대에 그에게 구두를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작고 허름한 제화 공방을 운영하며 제화교실을 열어 네 명의 수강생에게 구두 짓는 법을 가르친다. 제화교실 수강생인 시인이 어머니의 구두를 만들고 곧 세상에 나올 아기의 구두를 만든다. 시인의 어머니는 사십 년 전에 이안과 반년 동안 동거하다 헤어진 여자였다. 이안이 결혼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아기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었으나 시인은 기도하듯 죽은 아기의 가죽신을 만든다. “더는 쓸데없어진 것이라는 이유로”(141쪽) 만들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죽은 아기에게 잘못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그는 혼신의 정성을 다하여 구두를 만든다. 미아는 구두 짓는 일을 그만두고 아줌마의 자태로 날품팔이 생활을 오래 지속해왔다. 아줌마 신분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허드렛일을 구해서 먹고살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주방보조를 하다가 돈을 모아 낸 식당이 비싸게 팔리고 몇 단계의 부동산 거래를 거치다 보니 미아는 본의 아니게 주방용품점 대표가 되어 있었다. 미아는 운동 삼아 나가본 성인 발레 교실에서 은퇴한 중년의 남성 무용수 유진을 만나 결혼을 약속한다. 미아는 인터넷 블로그에 나온 구두를 보고 그것이 이안의 구두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유진의 구두를 주문한다. 이안은 구두를 만들어 주면서도 미아와 유진의 관계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유진이 지도하는 예술대학 학생들의 무용 공연을 보면서 수천 년 전 그들이 처음으로 구두를 만들던 때를 기억한다. 신전에 들어간 주인의 구두를 지키던 노예 소년이 친구들과 장난하다 구두를 잃어버렸다. 울고 있는 소년 노예를 위해 구두를 만들어 주자 아이는 그 신을 들고 춤을 추었었다. 애초에 그들은 누군가의 미소와 평화를 위해 구두를 지었었다. 이안은 미아와 유진을 축복하고 시인의 어머니에게 구두를 만들어 주겠다는 전화를 하려고 결심한다. 보들레르는 『현대생활의 화가』에서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사라지기 쉬운 것, 우발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을 차지하며 예술의 나머지 절반은 영원한 것과 불변의 것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유행이 지닐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유행으로부터 끄집어내는 일,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끌어내는 일”이 화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말은 이 소설의 주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처럼 읽힌다는 것은 소설답지 않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므로 나는 이 작가가 앞으로 무한은 잊어버리고 유한한 현실에 좀 더 깊이 침투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헤겔은 무한을 유한의 내적 동태라고 했다. 무한은 유한과 따로 있지 않고 유한을 부정하는 힘으로서 유한한 것의 심장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오정희·소설가

◊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구두장이 꼬마요정이라는 오래된 민담내지 동화에 뿌리를 둔 소설로,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가 지어준 옷을 입고 민담의 세계를 떠난 요정들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이 세상에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간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 없이 그저 할 줄 아는 것은 그것뿐이기에, 그 무심함과 무지로 인해 더욱 빛나던 아름다움으로’ 구두를 짓던 요정들은 인간세상의 변천과 흐름속에서 인간의 조건과 속성과 모습을 갖춰가면서 그들이 택한 삶의 길로 흩어져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고흐의 구두그림,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신으면 춤추기를 그칠 수 없다는 마법의 분홍신, 거칠 것없이 자유롭고 정처없의 비유로 쓰이는 바람구두 등을 떠올린다. 구두란 자유와 방랑, 존재의 근거,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노역과 행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지상의 삶을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구두의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은유에 덧들여 작가는 예술의 본질적 미학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최초 구두장이 요정중의 하나인 ‘미아’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발레리나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불멸을 포기하고, 이 세상의 마지막 구두장이 ‘안’은 심혈을 기울여 발레리나의 구두를 만든다. 발레리나가 그 구두를 신고 무대에 올라 지상에서 허공으로 도약하는 순간의 동작에 물방울처럼 반짝이며 튀어오르는 요정들의 존재를 되살림으로써 그것은 ‘영원히 낭독이 불가능한 언어로 이루어진 한편의 시’로 완성된다.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9편의 단편소설들로 구성된 작품집으로 그중 ‘검은방’ 과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큰아배, 머슬 보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큰아버지가 말했다.

‘보긴 머슬 봐. 사방이 시커먼 허방인디’


새빨간 고추가 마당가득 널린 환한 대낮, 눈을 찌르는 밝은 햇살아래서 영원히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 무엇엔가 홀리고 휘말리면서 일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불도장이 찍힌 사람들. 살아 있으되 이 세상에 속할 수 없고 결코 평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비극적 생애는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단지 시대적 문제뿐이 아닌, 그너머 인간 본성과 생자체가 품고 있는 깊은 어둠과 고독을 짚어내고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그 내면의 어두움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중음의 세계를 그림자처럼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감상을 절제한 따뜻하고 처연한 눈길에 함께 젖어든다.


◇정과리·문학평론가

◊ 전반적인 인상

1.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소설의 생존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형세이다. ‘이야기’와 ‘문채’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인간사의 대용품들의 공장으로서 출현했던 소설은 19-20세기에 누렸던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잃고 매체와 유통 구조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 제작체’의 번성에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형국이다. 이 신종으로 출현한 이야기 생산물들은 본래 소설이 누린 영향력을 좇으면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라서 언제 이 소설이 저 소설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곤란함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때 정말 필요한 것은 소설의 종말이라든가 문학의 소멸이라든가, 이런 말세론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21세기 벽두에 이런 쓸모없는 군말들로 인해 에너지 낭비가 얼마나 심했나), 언어문화의 변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심각한 토의이다. 그걸 혼자 할 수는 없다. 생각 있는 문학 종사자들이 모두 머리를 모으고 궁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연구와 평론의 제도적 분리라는 이 희한한 한국적 풍토 속에서 상당수의 능력 있는 문학 탐구자들이 19-20세기 문학의 공동묘지에 번잡하게 물을 실어 나르고 있고(그 물은 소생수인가? 적어도 사자들을 ‘쇼생크 탈출’시키기 위한, 한 모금 추김물인가?), 오늘의 문학을 다루는 잡지판에는 채 무르익지 못한 느낌과 주장들이 사유(思惟)의 이름을 걸고 시급 현안의 딱지를 붙인 네모 상자에 담겼다가 장난감 인형처럼 튀어나오고 있는가 하면, 여전히 작가들은 자신의 책을 한 부라도 더 팔아줄 출판사에 목을 대고 있다(지난 30년 간 그렇게 해서 잘 나가던 작가들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소설은 분명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하는가, 이다. 그 발생사에 대해 말이 많고도 많은 소설이, 그리고 “모든 소설은 반-소설이다”(키베디-바르가)라는 명제에 걸맞게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 온 소설이 지난 2세기 동안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장르로 군림한 까닭이 단순히 상업성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소설이라는 것의 존재 ‘이유cause’에 대해 우리는 다시 ‘가열차게’(옛날 운동권들의 상시적 부사어를 쓰자면) 피튀기는 논쟁을 해서 소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폐업할 것인지, 다른 장르에 양도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저 옛날에 ‘나리던’ 눈은 어디 있는가?”(프랑수아 비용)

2. 문학의 변화를 예감케 하는 또 다른 현상은 작가-정보해독자들의 출현이다. 원래 소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그것이 ‘체험적 인문학’의 일종이라는 데에 있었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소설도 그러한 지적 성찰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 다른 존재들의 출현이 확연히 느껴진다. 즉 최인훈·이청준·이인성 같은 인문적 지성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사실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추이를 진단하는 정보적 지성이라 부를 수 있는 소설가들이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적 지성이 삶에 대한 종합적 지혜에 근거해 세상을 진단한다면, 이 정보적 지성은 귀납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구체적인 정보들에 면밀한 논리를 부여하며 세상에 대한 통찰을 생산해낸다. 지난 번에 후보작으로 올랐던 이현석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번엔 아쉽게도 오르진 못했으나 주목을 해야 마땅한 조광희의 『인간의 법정』(솔출판사) 역시 전문지식의 정확한 이해를 통해 인간사에 개입하며 상상의 문을 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가 가진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수집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채집된 장보들에 판타지를 입혀서 ‘공상과학소설’을 만들곤 하는 풍토가 S/F를 내세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여전히 보여지는 현상이긴 하지만, 유의미한 ‘과학소설’의 길은 과학의 원리와 삶과의 유관성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 미래를 구상하는 데에서 제대로 열릴 것이다. 저 옛날 김호진의 『인디케이터』(국민서관, 1999), 이영의 『신화의 끝』(좋은 벗, 1999), ‘듀나’의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지성사, 2002)을 통해 개시되었던 그 길이 이제 본격적으로 개척되기를 기대한다.


◊ 구병모의 『바늘과 가죽의 시』

우리 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에 “아직도 고3수험생처럼 사느냐”고 핀잔을 맞곤 하는 사람이 있다. 워낙 바탕에 갖춘 게 없어서, 열심히라도 하지 않으면 뭔가 늘 부족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불안해지니 쉼없이 몸을 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긴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쓸모가 없어서 방치되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버려진다. 그가 그렇게 사는 건, 그렇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

뜬금없이 사생활의 못생긴 조각을 들추어낸 건, 구병모의 소설을 읽다가 뭔가 유사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방금 폭로된 이야기에서 ‘부정적인 것’만 빼 놓으면, 구병모식 글쓰기에 흡사하며, 그것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형태적 특성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구병모의 소설에는 대용량의 에너지들이 투여된 흔적이 역력히다. 그는 모든 세목에서 최대한의 공을 들인다. 착상, 수사, 묘사들 하나하나가 세밀히 기술된다. 문제는 작가의 몰입이 과해서 이 세목들 사이에 경중이 적절히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기보다는, 각 부분들의 힘이 무척 세서, 작품 곳곳에서 이리 불퉁 저리 불퉁 융기하면서, 다종의 삽화들을 잇고 엮은 언어 블록이 된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몸으로 깃들어 제화업자가 된 어떤 정령의 이야기가, 경제, 계급, 사랑, 해후, 제화공정, 출산, 취미생활, 존재, 시간, 노화, 불멸, 필멸과 신생 등의 인간사의 모든 주제들로 번식해 나가고, 이 이 각각의 분야에서 쓰이는 특별한 용어들을 동반하면서, 별의별 이야기거리들이 사방에서 열천의 기포들처럼 떠올라 저만의 색깔을 가진 증기들을 토해내다가 꺼진다.

20세기 후반기에 이런 미학적 시도에 대해 ‘바로크Baroque’라는 명명이 있었다. ‘전체의 조화를 위한 부분들의 긴밀한 협력’을 핵심원리로 갖는 ‘고전주의classicisme’의 울타리 바로 바깥에서 부분들의 자율성과 생성성을 보여주면서 우아의 화단 옆에서 기화요초들을 번식시키며, 당시의 지배 사조였던 고전주의를 폭파할 것 같은 기세로 등등히 확산하던 미적 경향이었다. 문학 쪽에서 바로크 운동의 윤곽을 그렸던 장 루세Jean Rousset는 훗날 그 운동이 고전주의를 다른 각도에서 본 것에 불과했다고 스스로의 업적을 부인했지만, 이 미학적 아이디어 자체는 20세기 후반기의 모험적 예술가들과 예술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요컨대 부분들의 자율성은 곧바로 개체(개인)들의 자유와 해방의 징후이자 실행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자율성은 곧바로 생성의 활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운동에 꽂힌 눈이 내다 본 원경 앞에는 오늘의 닫힌 전체를 부수고 양과 질에 있어서 모두 격상된 ‘열린 전체’의 세계가 꿈틀거리며 잉태되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열린 전체’라는 개념 그 자체. 그것은 그냥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자율성에 정밀한 통제를 가해야만, 다시 말해, 자율화를 더욱 북돋는 방식으로 제동을 걸어야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서, 그것 자체가 매우 복잡한 공정을 요한다는 것이니, 바로크 앞에 바로크 절차들이라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숙제가 바로크풍으로 거듭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쪽 가량의 이 소설에 핵심 주제는 4분의 3쯤 지나서 제시된다. 이 소설은 “가죽과 가죽을 바늘과 실로 잇는 행위”라는 것. 그 행위는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의 존재로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심함과 무지로 인해 더욱 빛나던 아름다움을 기억한다고. 가죽과 가죽을 바늘과 실로 잇는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서 숨 쉬는 것이나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무두질이 잘되어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가죽에 바늘을 대는 순간, 바늘은 저절로 노래를 불렀다. 노동은 영원한 이명과도 같이 그들에게 달라붙은 것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듯 일하는 것이 존재의 몫이었다. 목소리만이 아닌 온몸의 노래. 구두에 새겨진 한 땀의 스티치마다 하나의 음계였고, 한 켤레의 구두는 왼쪽과 오른쪽이 만나는 화음이었다.”(pp.145-146)


이런 미학적 실행이 그대로 영원을 표백하고 증거할 것인가? 아니면 필멸이 예정된 인간들을 쬐는 햇빛의 기능을 할 것인가? 왜냐하면 그 필멸인 것들은,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149)이라서 애틋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 신생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불멸의 존재들이 결코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무의미한 삶을 덧없이 사는 존재들과 몸을 바꾸는 것은 좋은 것인가? 아닐 것인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이 물음을 가죽들을 잇는 바늘의 문체로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은 썩 감미롭다.

어쨌거나 이런 핵심 주제는 한데 지금까지의 긴 우여곡절의 필연적 도달점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닌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 정지아의 『자본주의의 적』

자신이 빨치산의 딸임을 밝히는 것으로 문학판에 등장한 정지아의 소설에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 이후의 세계에 대한 종합적 상황 판단으로 보인다. 그 상황 판단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신세를 자본주의의 정신적 포로이자 무기형 수인으로서 규정(?)함으로써 도출되는 것으로서, 그 판단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승리는 완벽해서, 누구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벗어난다’는 말은 화자를 비롯 그와 정서적으로 연결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단어인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요란한 비판자들까지도 실은 아주 적극적으로 이 세계의 원리를 낼름 삼킴으로써 무늬만 빼고 속은 모두 푸른색이 되었으니, 이 세상은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모두가 자발적으로 푸른 광장에 모여, 이득과 출세의 경연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벗어난다’는 말은 오로지 화자와 그 동류들의 머리에만 거주하는 것이자, 동시에 이제 쓸 까닭이 없는 ‘죽은 말’이 되었으니, 왜냐하면 화자들조차도 거기에서 벗어날 꿈을 결코 꾸지 못할 지경으로 자신의 존재가 늘 불 켜진 대로에서처럼 훤하게 발각되어 있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그들은 제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싶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에 대한 어떤 하소연이나 불평도 곧바로 재화를 발생시킬 요인으로 써먹히는 것이니 가만히 침묵하는 게 최선인 듯한데, 그러나 침묵조차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처지이다. 왜냐하면 평생을 유폐당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점호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은 영원한 수인의 처지를 절감한 사람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상황이야말로 소설이 쓰여져야 할 이유와 그 방법을 명백하게 제공해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어쨌든 존재가 발각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그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는데, 그를 가둔 채로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세계가 그 폭로의 행동을 보장할 수밖에 없으니, 이야말로 소설쓰기의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효과는, 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서로 적대하면서 한통속으로 어우러져 신나는 한 세상을 꾸려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적을 자처한 자들은 이 소설을 거울 삼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썩 유익할 것이다.


◇구효서· 소설가

/김연경 객원기자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자본주의의 적>이라니. 겁먹지 않을 독자가 없을 제목이다. ‘여기 자본주의의 진정한 적이 있다.’ 첫 문장이 이러하니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지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데다 사회주의자였던 자신의 부모마저 ‘마음’으로나 영원한 왕년의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정도니 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이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저 딱딱한 제목이며 첫 문장의 결기가 새로 개발한 정지아의 골계라는 것을. ‘마음 따위 개나 주라지.’부터 슬슬 긴장이 풀리다가 그녀 정지아의 대학 친구 (진정한 자본주의의 적)방현남이 나오고부터 소설은 제동장치 없는 재미라는 썰매로 무섭게 내달린다. 그러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저 아래 까마득해질 만큼 허공으로 치솟기도 하는데 독자가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롤러코스터의 스릴이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로부터 팽팽한 거리를 유지했다면 그것에 대한 오서독스한 비판이 되었을 테지만 일부러 제동장치를 제거한 소설은 통제선을 뚫고 날아오르며 조마조마하지만 유쾌한 비행을 계속한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그래서 처음부터 긴장 따위 하지 않게 되는데, 그렇잖아도 첫 문장이 ‘좆됐다.’이니 웃을 준비만 하면 그만이다.

문학박사 정지아가 좆됐다는 말인데, 그 사정이 도무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기도 하지만 더불어 궁금해지는 것은 어째서 이토록 작가는 과도하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걸까 라는 점이다. 노출 정도가 아니라 숫제 ‘셀프 디스’니까.

기이하달만큼 지독하고 천성적인 방현남의 반자본주의적 삶을 낱낱이 더듬는 것도 결국 이도저도 아닌 작가 자신의 삶의 태도를 맵게 꼬집는 과정일 뿐더러, 더 직접적으로는 문학박사 따위 개나 주라지 식의 서늘한 언표를 서슴지 않는다. 이런 서늘함이 롤러코스터의 유쾌함 배면에 깔리는 스릴이며 작가 정지아가 이 소설집에 준비해 놓은 문제적 그늘들이 아닐까.

직간접적 자기 성찰과 혹독한 응시의 페이지들이 지나고 나면 작가(화자가 아닌 작가라고 계속 말하는 것은 화자가 계속 정지아기 때문이다)는 눈을 돌려 어머니(<검은 방>)와 사촌(<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을 본다. 눈을 돌려 볼 것도 없을 만큼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 눈을 돌린다는 말은 다른 눈으로 본다는 말이겠다.

‘알까’라고 묻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소설에서 봄의 문제는 이제 앎의 문제로 인식된다. 못 보았던, 몰랐던 것에서 보게 된, 알게 된 사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서사가 펼쳐진다. 어머니에 대한 봄과 앎의 경로는 특수하게도 작가가 어머니 화자에 빙의하는 방식을 통해 진행되어, 앎이란 인식의 범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욕망 혹은 사랑이라는 무정형의 정념과 체념적으로 마주하는 일일지 모른다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스릴 있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아흔 아홉 살 빨치산 출신 어머니와 작가 자신을 함께 대상화 해 ‘사상을 잃은 뒤로 딸이 그녀의 사상이 되었다.’고 써낼 사람이 정지아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앎의 눈으로 보니 어려서부터 무시하고 최근까지 한심하게 여겼던 사촌 기택이 예사로울 리 없다. 집단 학살의 와중에 말을 잃고 검게 뚫린 입으로 소주를 부어넣으며 평생 허방에 빠져 소멸의 삶을 산 아비의 그늘에서 자란 사촌 기택. 간암에 걸린 기택에게 숨겨놓았던 술을 내주는 어머니를 이전 같았으면 가만 보아 넘겼겠는가. 어머니의 눈으로 기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나의 눈을 버리고 새 눈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같다.

‘알까’는 묻는 말이 아니라 ‘모른다’는 뜻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전보다 이제 조금 더 알게 된 자가 스스로를 포함한 ‘우리’를 향해 비로소 조심스럽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이런 젠장.’ ‘좆됐다.’ ‘소확행은 개뿔.’ 이라며 ‘박사님’답지 않은 허텅지거리를 뱉는 이유를 알겠다. 박사님이란 크게 많이 넓게 아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뭘 알았겠느냐는 거겠지. 기운 펄펄 나던, 학생운동하고 연애하고 공부하던 시절에는 모든 앎이 까만 밤하늘에 씻어놓은 별처럼 명료했다. 그런데 40이 넘어 간신히 지방대에 자리 잡고 어머니 곁 고향 구례로 돌아온 65년생 이혼녀 문학박사 정지아는 이제 자신이 없다. 그토록 명료하던 것들이 흐리마리. 모르겠다.

실은 작가의 앎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모르겠다는 앎. 현재로선 어쩌면 그녀 문학의 유일한 윤리일 이 고백이 《자본주의의 적》의 향기다. 그녀의 경신이고 소설의 진화다.


◊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바늘과 가죽으로 만드는 것은 구두다. ‘바늘과 가죽의 시’를 ‘구두의 시’라고 줄여 말해도 틀릴 건 없다. 하지만 구두와 시라니. 멀게만 보이는 이 두 이름 사이의 비약을 메우려면 한 권의 소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구두는 등장인물 간에 예외 없이 개입한다. 남매 구두장이와도 같은 운명을 타고난 안과 미아, 구두공방 선생과 제자로서의 안과 시인, 어머니에게 구두를 만들어 선물하는 시인 아들, 40년 전 구두공장의 동료연인이었던 안과 시인의 어머니, 발레 강사 유진과의 혼인식을 위해 구두를 주문하는 미아, 태어날 아이를 위해 사랑으로 구두를 만드는 시인과 탄생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아이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이것만이라면 구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쁨과 슬픔, 혹은 감동을 전할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도무지 유가 다른 사람이 등장하여 문득문득 정황을 아득하게 만든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안과 미아는 5백 살인지 5천 살인지도 모르는, 죽지 않는 비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처럼 보통 사람이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마련하고 유한과 무한,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아득한 허공에다 구두를 띄움으로써 구두라는 사물이 마침내 시의 영역에 이르게 한다.

유한한 생명과의 숱한 이별을 겪으며 아픔을 지녀왔을 안과 미아지만, 사랑의 진심을 뿌리칠 수 없어 안은 또다시 시인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미아는 발레 강사 유진을 사랑한다. 이처럼 체념하듯 필패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시의 순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지 않고는 어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아이가 아내의 몸속에서 죽은 뒤로도 시인은 아이를 위한 구두 제작을 멈출 수 없다. 달리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의 지대가 아니더라도 길을 나설 수밖에 없는 것, 필멸을 각오하며 걸음을 내딛는 것,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하게 하는가에 대하여, 누구는 신이 하는 일이라 했고 누구는 사랑이 하는 일이라고도 했는데 구병모는 그것을 아름다움이 하는 일이라고 쓴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62)의 단편소설 ‘마음의 부력’이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변주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온 작가의 최근작들에는 내용과 스타일에서 다른 시도들이 보인다. 소재의 영역이 넓어진 것도 반갑지만, 무엇보다 화자/작가를 비하하는 방식의 풍자적 서술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색감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 좋다.

정지아의 소설에는 소설의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춘 균형감이 만들어 내는 안정감이 있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이야기의 설득력 있는 전개와 문장,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메시지가 중요한데,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기왕의 이런 믿음직한 구조는 잘 유지되고 있다.

특정 시간의 역사적 사건은 정지아 소설 속 인물들의 서사를 지배하는 요인이어서 결정적인데(가령 ‘검은 방’이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그러나 그 경우에도 작가는 사회 역사의 문맥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즉 운명을 맞세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은 때로 고통스럽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서는 분노든 뭐든 할 수 있지만 운명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첫 번째 단편인 ‘자본주의의 적’은 그동안 우리 소설에서 거의 보지 못했던 독특한 인물의 창조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작가가 ‘자본주의의 진정한 적’이라고 소개하는 이 ‘자폐가족’은 ‘자본주의의 동력 그 자체인 욕망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없는 욕망을 만들어내야 유지될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는 이들이야말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욕망 그 자체가 부재하므로 ‘자본주의의 전원을 오프시킨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 특별한 캐릭터에 마음을 빼앗겼다. 소비사회의 한복판에서 욕망에 지배받지 않고 사는 일이 가능한가. 이 불가능한 일을 실천하며 사는 이 ‘자폐가족’이 내게는 거의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속의 성자 이미지. 소설의 화자/작가는 인간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라고,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을 터뜨린다. 나 역시 그랬는데, 한탄보다 감탄 쪽이었다.


◇김인숙·소설가

/전기병 기자

◊ 정지아 : 자본주의의 적

이 작가의 소설적 세계는 어디까지 확장될까. 아홉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자본주의 적’에서 정지아가 보여주는,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다채롭다. 각각의 소설은 더욱 ‘이야기적’이고, 그 이야기들은 더욱 깊거나 은근하거나 능청스럽다.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서도 그렇다.

아홉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좌충우돌하는 ‘문학박사 정지아’가 되기도 하고, 99세 빨치산 출신 어머니의 딸이 되기도 하고, 어떤 주변의 세계에 이른, 그 세계보다 더 쓸슬한 주변인이 되는 경험을 하게도 될 터인데, 그렇게 이입을 하게되는 것이 작가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솜씨 때문일 리만은 없다. 자전적 요소와 허구가 교차하며 풀려나가는 이야기들, 실재하는 것과 실재했을 법한 것과, 실재했으나 증명되지 않았던 것들로 직조된 이야기 속에 실은 작가의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도 같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빨치산의 딸’로 잘 알려진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그 시간은 역사적인 상흔과 단단히 묶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간을 거쳐온 사람들 모두에게 남겨진 흔적이기도 할 터이다. 우리는 이때 그 시간에 대해, 그 시간이 만든 세계에 대해, 그 세계를 속절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물을 수 있을까.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소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이 소설 속에서 작가의 사촌동생으로 등장하는 인물 기택은 구제불능의 알콜중독자이다. 죽을 걸 알면서도 술을 못 끊는다. ‘눈만 감으면 세상이 새까매서’ ‘허방처럼 새까매서’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술을 못 끊는 이 인물을 탓하는 화자에게 99세인 화자의 어머니가 묻는다. “너는 사는 거이 네 맘대로 된다디야?”

사는 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이 단순한 말이 울림이 되어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 순간 먹먹해져버리는 것은, 다시 한번 작가의 이야기 솜씨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작가의 정성스러운 시선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있는 힘껏 바라보는 일은 자신을 있는 힘껏 내어주는 일이기도 할 터인데, 소설 속 인물인지, 그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인지, 누군가를 통째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한다. 정성껏 읽었다.


◊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영원히 사는 것만큼 고독한 일이 있을까. 시작도 끝도 없는 알 수 없는 삶이라는 것, 혹은 살아있다는 것의 공허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고독하고 공허하고 허무한 나머지 그 모든 것의 의미조차 무화되어버리는 세계의 이야기. 그래서 구병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신발을 만드는 존재들일까. 어떻게든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하는. 적어도 발만이라도. 그리고 그 발로 간신히 한발 한발씩 걸어서 메우는 시간들. 아니, 메워지는 시간들.

‘바늘과 가죽의 시’라는 제목만큼이나 이 소설은 시적인 문장으로 압도한다. 무의미한 시간과 세계를 소설은 무엇으로 의미화시킬 수 있을 지. 그럴 필요나 있을지. 혹시라도 필요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마도 문장 뿐일 것이다. 바늘로 한땀한땀 떼워 가죽으로 이어붙인 문장, 한걸음 한걸음 간신이 이어져 통째로 문장이 된 소설. 그러므로 이 소설의 감상평에 대해서는 소설의 어느 한페이지를 그냥 펼쳐, 거기 어디에 있는 것이든, 그냥 문장을 하나 소개하는 것이 낫겠다.

‘무엇보다 이 비명과 통곡과 죽음의 시절, 인간과 괴물이 앉은 자리를 바꾸고 정령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존재들은 기거할 터를 잃은 지 오래이며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삶 자체가 죽음의 수많은 양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때, 우리가 바다를 건넌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살아남는다 치면 그 영속성이, 그러나 영원한지는 알 수 없는 고작 그뿐인 지속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란 무엇이겠는지를 묻지 않는다. ' ' 우리는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