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플루트’로 불리는 명연주자 제임스 골웨이, 정상급 바이올린 연주자 대니얼 호프, 베를린 필의 오보에 수석인 알브레히트 마이어, 그래미상을 받은 한국계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까지.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톱스타들이 한데 모여서 음반을 녹음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소식이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은 더 있다. 이들이 연주한 음악들이 ‘사랑의 불시착’ ‘미스터 션샤인’ ‘도깨비’ ‘태양의 후예’ 같은 한국 드라마 주제가라는 점이다. 이들이 녹음한 한국 드라마 음반이 다음 달 전 세계에 출시된다. 음반의 부제도 ‘한국 드라마 사운드트랙(Korean Drama Soundtracks)’이다.

한국 드라마 주제곡 음반에 참여한 연주자들. ①플루트 연주자 필립 윤트, ②베를린 필의 오보에 수석인 알브레히트 마이어, ③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골웨이, ④한국계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 /유니버설뮤직 코리아·봄아트프로젝트

이 음반의 아이디어를 꺼낸 주인공은 스위스 출신의 플루트 연주자인 필립 윤트(43). 독일 바이마르 음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2008년 강남대에 교환 교수로 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4일 화상 인터뷰에서 그는 “맨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이 한국 음식이었고, 그다음이 드라마였다. 한국 생활을 시작할 때 외로움을 많이 겪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부터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 판타지까지 다양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삽입곡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12년간 한국에 머물렀던 윤트는 수백 편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지난해 스위스 뇌샤텔 음악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지금도 매주 두 차례씩 스위스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는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영어로 말하다가 도중에 막히면 곧바로 한국어로 바꿔서 말했다. ‘사랑의 불시착’과 ‘빈센조’ 같은 드라마 이름은 물론, “조금 말할 수 있어요” “광주 바로 옆의 곤지암”이라는 설명도 한국어로 척척 해냈다.

그는 미국과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매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한국 드라마 음악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윤트는 “미국 영화음악은 독일 작곡가들의 영향으로 드라마틱하고 서사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이탈리아는 서정적인 선율이 매력적”이라며 “한국은 그 두 가지 장점을 물려받은 뒤 고유한 스타일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한국통’이 된 그는 2018년 LG아트센터에서 ‘응답하라 1988’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한국 드라마 주제곡을 클래식 풍으로 편곡해서 들려주는 음악회도 열었다. 그 직후 음반으로 녹음해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그는 우선 80여 곡을 선정한 뒤 계속 줄이는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17곡을 음반에 실었다.

이번 음반을 준비하면서 그는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기준이 있었다”고 말했다. 내한 공연을 갖거나 한국과 인연이 있는 연주자들을 최대한 섭외하자는 원칙이었다. 윤트는 “한국의 클래식 연주자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통할 만큼 수준이 높다. 그렇다면 이번엔 나 같은 서구의 연주자들이 한국 음악을 연주해보는 것도 좋은 음악적 교류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골웨이와 마이어, 용재 오닐 같은 연주자들이 흔쾌히 그의 초대에 응했다. 2019년과 지난해 스위스와 독일 베를린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녹음했다. 그는 “모두 바쁜 일정이었지만 2~3일씩 시간을 내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현재 스위스에 머물고 있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음반에 실린 한국 드라마 음악들을 주제로 오는 8월 내한 공연을 갖는다. 윤트는 “코로나 때문에 당장 전 세계에서 공연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한국 음악을 꾸준하게 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