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오늘은 김성현 기자가 최근 세상을 떠난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YONHAP PHOTO-5135> 향년 77세로 타계한 세계적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 (레녹스 AP=연합뉴스) 10대 남성 성추행 의혹 폭로로 불명예 퇴진했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이 지난 2006년 7월 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의 탱글우드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 러바인은 지난 9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서 자연사했다고 그의 주치의인 렌 호로비츠가 17일 전했다. 향년 77세. jsmoon@yna.co.kr/2021-03-18 08:00:27/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얼마 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메트)의 음악 감독을 지낸 지휘자 제임스 러바인(78)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명확한 사인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난 10여 년간 신장 질환과 허리 디스크, 어깨 부상 등으로 수술과 복귀를 거듭했지요.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러바인은 지난 40여 년간 2500회 이상의 공연을 지휘하면서 메트를 미국 최고의 오페라극장으로 키운 명지휘자입니다. 메트가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으로 발돋움한 건 분명 러바인의 공이 적지 않지요.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레너드 번스타인 이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라고 불렀습니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도 “다른 극장에 가면 메트보다 4~5배의 출연료를 받을 수 있지만, 거기엔 짐(제임스 러바인의 애칭)과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격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1960년대부터 10대 소년 4명을 성 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2018년 메트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불명예 퇴진한 그는 계약 위반과 명예 훼손으로 친정인 메트와 법적 다툼을 벌이다가, 지난해 350만달러(39억원)의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러바인처럼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도 흔치 않지요.

메트는 그에게 사실상 ‘평생 직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인 1971년 그는 오페라 ‘토스카’로 이 극장에 데뷔했지요. 당시 마티네 공연은 최종 무대 리허설도 없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메트 최고의 지휘자가 될 지도 모른다”(뉴욕타임스)의 호평을 받으면서 일찌감치 미국 음악계의 기대주로 꼽혔지요. 실제로 그는 1972년 메트의 수석지휘자, 1975년 음악감독, 1986년 예술감독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이전까지 미국의 지휘자들은 유럽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러바인은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에서 꾸준하게 지휘했고, 뮌헨 필하모닉(1999~2004)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요. 베르디의 이탈리아 오페라부터 바그너의 독일 오페라, 20세기 현대음악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통해서 메트의 음악적 혁신을 주도했습니다.

러바인의 죽음 이후 그의 공과를 되짚는 추모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적 재능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지요. 우선 그는 열 살 때 고향 신시네티의 교향악단과 협연했던 피아노 신동입니다. 당시 데뷔곡은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고 하지요.

빼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지휘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뒤에도 악단 단원들과 실내악 연주회를 즐겨 열었지요. 이런 실내악 연주회는 자연스럽게 악단의 앙상블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담임 선생님’이 피아노에 앉아서 자신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다면, 누가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러바인의 경우에는 지휘자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도 녹음과 영상이 적지 않은 편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도 그의 복(福)입니다. 만 스무 살이었던 러바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부지휘자로 과감하게 발탁했던 지휘자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던 조지 셀(1897~1970)입니다. 러바인은 6년간 클리블랜드에서 재직하면서 지휘의 기초를 닦았지요. 독일 평론가 볼프강 슈라이버의 ‘지휘의 거장들’(을유문화사)을 보면 당시 셀은 러바인에게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서 지휘하도록 시켰답니다. 그리고서 수시로 지휘를 중단시킨 뒤 제2플루트와 잉글리시호른의 선율을 물어볼 만큼 혹독하게 다그쳤다고 합니다. ‘교향곡 전곡을 입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했다’고 했으니 실력이 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최종 판결이 내려진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메트는 복수의 증언을 토대로 “성적 학대와 추행”이 있었다는 자체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요. 특히 아동과 약자에 대한 인권 존중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뉴욕타임스의 부음 기사에도 ‘섹스 스캔들로 쓰러진 명지휘자’라는 제목이 붙었지요. 말년에 이를수록 음악계의 존경을 받았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나 마리스 얀손스 같은 명지휘자들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세상사든 음악계든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