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조선 화가 이암의 '화조구자도'(보물 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16세기 조선 화가 이암의 강아지 그림이 17~18세기 일본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키오 리핏 하버드대 교수가 19일 열린 한국미술사학회 창립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강아지 애호: 일본 에도시대 이암 회화가 남긴 유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서다.

이암의 '화하유구도'. 도쿄 일본민예관 소장. /유키오 리핏 교수

이암(1499~?)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구의 증손으로 왕실 종친이다. 조선 초기 동물화에서 독자적 화풍을 정립한 화가로 꼽힌다. 대표작이 ‘이건희 컬렉션’으로 잘 알려진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보물 제1392호)’. 봄날 꽃나무 아래서 어울려 노는 강아지 세 마리를 사실적으로 그린 걸작이다. 누렁이는 단잠에 빠졌고, 흰둥이는 방아깨비를 물고 장난을 친다. 시선을 장악하는 건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검둥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무언가를 빤히 응시하는 눈매, 안경테를 두른 듯한 묘사가 슬며시 미소 짓게 한다. 터럭을 한 올 한 올 묘사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번지는 채색 기법으로 강아지들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하마터면 북한으로 갈 뻔했던 그림을 우여곡절 끝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구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암의 영향을 받은 17세기 일본 화가 다와라야 소타츠의 강아지 그림. /유키오 리핏 교수
이암의 영향을 받은 다와라야 소타츠의 강아지 그림. /유키오 리핏 교수

리핏 교수는 “이암의 강아지 그림은 17세기 초 이미 일본에 들어와 유통되면서 에도시대의 저명한 화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다양한 아류작을 파생시켰다”며 일본 화가 5인의 작품을 예로 들었다. 17세기 화가 다와라야 소타츠(1600~1640)를 비롯해 18세기 요사 부손(1716~1784), 마루야마 오쿄(1733~1795), 나가사와 로세츠(1754~1799), 이토 자쿠추(1716~1800) 등이다. 그는 “이들의 강아지 그림도 이암의 영향을 받아 평면적 채색법과 명암 효과를 썼다”며 “하지만 당시 일본 화가들은 이암이 조선 화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중국 화가의 작품으로 오해했다”고 했다.

요사 부손의 '구자도'. 일본 개인 소장. /유키오 리핏 교수

일본 문인화가이자 하이쿠 시인으로도 알려진 요사 부손의 ‘구자도(狗子圖)’가 대표적이다. 리핏 교수는 “특히 왼쪽 위 검은 강아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구도, 색의 음영, 자연스럽게 번지는 기법까지 이암의 ‘화조구자도’와 매우 흡사하다”며 “이암의 영향을 받은 강아지 그림의 화풍은 18세기 중후반 교토 화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다”고 했다.

지난 2007년 교토 로쿠온지에서 발견된 이토 자쿠추의 '방아추희도'. /유키오 리핏 교수

흥미로운 건 이 시기 강아지 그림이 선종의 가르침과 결합해 독특한 화풍을 이뤘다는 것. 그는 “강아지 그림은 흔히 다복과 번영, 가족의 화목을 상징하는데 에도시대 일본에선 새로운 의미가 부각된다”며 “선문답의 도구로서 강아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선종 해석의 지평을 넓혔다”고 했다. 강아지 색깔을 주로 검게 그린 것도 ‘침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리핏 교수는 “이암의 작품이 일본에 남긴 유산은 이제 막 밝혀지기 시작한 단계일뿐 아직 온전히 발굴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토 자쿠추의 '백구도'. 개인 소장. /유키오 리핏 교수
이토 자쿠추의 '백구도' 부분. /유키오 리핏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