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한 건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언제나 그랬듯, 배우 김희선은 거침이 없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통통 튀는 매력과 독보적 스타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의 미녀’이자 ‘트렌드 리더’로 매스컴을 달궜던 그녀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이톤 목소리에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선 세월의 흔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10일(월) 밤 10시 처음 방송될 TV조선 드라마 ‘다음 생은 없으니까’에서 주연 조나정을 맡은 그녀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성격이나 말투 모두 나와 가장 닮은 캐릭터”라고 했다. TV조선이 개국 이후 선보이는 첫 월화 드라마를 그녀가 이끌어 가게 됐다.
그녀가 맡은 조나정은 과거 촉망받는 쇼호스트였지만 현재는 아들 둘을 가진 ‘경단녀 엄마’로, 6년 만에 현장에 복귀해 각종 어려움에 맞서가는 역할. 김희선을 필두로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분투하는 ‘41세’ 세 여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배우 한혜진이 무성욕자 남편과 아이를 낳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아트센터 기획실장 구주영 역, 진서연은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잡지사 부편집장 이일리 역을 맡아 절친 3인방의 좌충우돌 코믹 성장기를 그려낸다.
고등학생 때 데뷔한 김희선 역시 ‘언제나 전성기’ 같은 삶을 뒤로하고 2007년 결혼했다. 그 이후 출산과 육아로 6년간 공백기를 겪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잖아요. 아이가 커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신기한 거예요. 거기다 야식을 먹는다고 누가 탓하길 하나, 몸무게가 80㎏까지 늘어도 다들 좋아해 주시니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인생의 상당 부분을 TV 앞에 살았던 그녀는 스스로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젖 먹이다 TV를 보면서 ‘저 역할, 딱 내 건데’ 하면서 괜히 질투했죠. 이러다 ‘인간 김희선’은 사라지는 게 아닌가 고민도 많았어요. 수백 명이 모여 분초를 다투며 전쟁같이 진행되는 촬영 현장의 긴장감이 그립더라고요.”
복귀가 전부는 아니었다. “대본 들어오는 게 달라지는 거예요. 이전에 주로 맡았던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도 자신 있는데, 엄마 역할 제안이 점점 많아졌어요. 왠지 모르게 속상한 것도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현실에 발 디딘 ‘생활인’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더욱 다가서기 위해선 마음부터 다잡아야 했다. “언제까지 ‘내가 김희선인데’ 할 수 있겠어요.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잘해내는 것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길을 터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식 없고 통 큰 대장부 같은 ‘김희선다움’이란 건 이런 데서 빛을 발휘한다.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2017) ‘앨리스’(2020) ‘내일’(2022) ‘블랙의 신부’(2022), 영화 ‘달짝지근해’(2023) 등 잇단 흥행작의 주역이 됐다. ‘예쁜 배우’에서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가 더 많이 붙기 시작했다. 딸과도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미 LA에서 유학 중인 딸을 만나러 갔는데, 현지 분들이 다가오셔서 ‘넷플릭스에 나오는 배우 아니냐’고 묻는 거에요. 딸아이 친구들도 어떻게 저를 다 알고 ‘네 엄마 멋지다’고 했다네요. 하하.”
‘다음 생은 없으니까’는 드라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세대들에게 “투혼을 던져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다. “열심히 하는데도 돌아오는 게 없는 것 같고, 비교는 더 심해지고, 그러다 보니 포기하는 일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 삶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다 보면 축적된 노력이 자기 자신에게 도움으로 다가오긴 하거든요.”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김희선은 “‘30년을 배우 김희선으로 살았는데 네가 그 기분을 알아?’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잖아요. 저도 늙죠. 어우, 괴롭죠. 속을 어떻게 다 꺼내보여요. 요즘은 대중이 엄격해져서 (자기 관리로) 물구나무라도 서서 걸어 다녀야 좀 인정해주실 것 같거든요.(웃음) 저라고 뭐 별수 있나요? 기왕 ‘이쁘게 늙자’ ‘좋은 일 많이 하고 가자’ 이렇게 다독이는 거죠.”
그렇다면 정반대의 질문.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김희선일까. “김희선요? 어우 괜찮아. 아직까지 큰 사건사고 없이 잘 살아왔고, 딸아이 잘 커나가고 있고, 결혼할 때 사람들이 ‘너 1년이나 가나 보자’ 했지만 아직 신랑이랑 거의 20년을 평범하게 살아왔고 (웃음)…. 비록 6년 쉬었지만 좋은 감독님들과의 인연 덕분에 아직도 활동하고 있고, 어디 가서 후배든 친구들이건 밥 한 그릇 사 줄 수 있는 그 정도, 그게 전부죠. 그렇게 살 수 있는 거면 김희선 인생 괜찮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