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는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용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태어나기 어려웠을 드라마다. UFO광 소녀들의 모험담으로 시작해 미스터리 호러로 심장을 조이더니, 애인을 납치한 외계인을 추적하는 스릴러로 진화한다. 이어 사이비 종교 집단을 파헤치는 블랙코미디가 됐다가 밀레니얼 세대 두 여성의 성장극으로 널뛰듯 요동친다. 매주 수요일 발표하는 넷플릭스 톱10에서 지난 19일 비영어 시리즈 주간 시청 시간 8위에 오르며 흥행 청신호를 켰다.
이 혼란스럽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쓴 사람은 디지털 세대 고교생 성매매를 다뤄 충격을 줬던 넷플릭스 시리즈 ‘인간수업’의 작가 진한새(38). ‘인간시장’과 ‘모래시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송지나 작가의 아들이다.
시작은 아내의 UFO 목격담이었다. “어릴 때 장모님과 손잡고 걷다가 UFO를 봤다는 거예요. 옥신각신했죠. ‘봤다’ ‘안 믿긴다’…. 그 과정이 신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 변증 논쟁처럼 신념에 대한 변증 같아 재미있었어요.” 최근 서울 북촌로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작가가 웃었다.
드라마 시작은 17세기 해적의 보물 지도를 발견한 아이들의 모험담을 다룬 ‘구니스’(1985)나 ‘슈퍼 에이트’(2011) 같은 할리우드의 소년 소녀 모험 영화를 닮았다. 방송 PD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는 어릴 적 아들에게 디즈니 단편 시리즈 같은 할리우드 드라마를 자주 보여줬다.
“맞아요. 처음엔 ‘구니스’를 생각했죠. 익숙한 현대 공간에서 익숙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상황. 소재가 정해지면 별 관계없는 듯한 이질적 소재들이 자석에 끌려들 듯 모이는 것 같아요. 개미가 집을, 새가 둥지를 짓듯이 이야기를 엮어 나갔어요.”
취업, 연애, 결혼, 직장 등 당연했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밀레니얼 세대를 주인공 삼은 건 “내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애매하다는 게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 아닐까 생각했죠. 4년을 사귀고 동거와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 친구에게조차 자기 눈에 외계인이 보인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는 주인공 ‘지효’(전여빈)처럼요.”
지효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줄 알았던 애인의 흔적을 뒤쫓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심장부로 잠입한다. 작가 역시 지효처럼 맞부딪치고 뛰어들며 이야기를 찾아나가기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건축을 전공해서 그럴까요. 이미지나 캐릭터, 장면을 상상하고 받아쓰듯이 출발해서 찾아가요. 그러다 보니 결국 이 이야기의 키워드는 믿음과 신념이더라고요.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뛰어들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는 후반부엔 맹목적으로 불신하는 사람,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으려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태도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신념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다니면서 생명을 얻는 것 같아요. 사실 저 나름대로 진지한 크리스천이거든요. 제 자신의 믿음에 관한 질문이 튀어오를 때, 그걸 이야기 여기저기에 올려 놓듯이 썼어요.”
UFO를 택한 것도 마찬가지. 그는 “가끔 UFO나 초자연 미스터리에 꽂히면 광적으로 찾아보는데, 계속 내 믿음을 깨부술 증거를 찾는다는 게 흥미로웠다”고도 했다. “사춘기 소년 같긴 한데…. ‘내가 이런 관념에 갇혀 있는데 깨뜨려줘, 나를 좀 꺼내줘’ 그런 생각을 해요. 저도 가끔씩 이상해요. 안 믿으면서 왜 자꾸 찾아보는지.”
자칫 난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완성한 데에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덕이 컸다. 그는 “가끔은 넷플릭스 분들이 더 열려있고 앞서가는 느낌이었다. 다른 작가들은 자제하라는 말을 듣는다던데, 저는 오히려 격려받고 고무되는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고교 시절부터 단편소설이나 시를 썼지만 남에게 보여주진 않았다. 그는 “글을 쓰는 건 내 자신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인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글리치’를 쓰고 나서는 자신에 대해 뭘 더 알게 됐을까. “그걸 알게 되면 은퇴하지 않을까요, 하하. 알 때까지 계속 쓰겠습니다. 다음 작품은 하이틴 로맨스를 해보려고요.”
쓰면서 자신을 알아간다는 이 작가, 이제 더 많은 시청자가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