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5년 이렇게 말한 지 26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 정치는 4류에서 5류로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대다수 한국 정치인들은 나름 각 분야에서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정치 실력과 수준은 후퇴하고 있는 것일까? 내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 등을 앞두고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언론학자들은 “혁신과 성찰없이 구태(舊態)를 반복하는 언론의 후진적 정치 보도가 결정적인 주범(主犯)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20년 전보다 후퇴한 한국 언론 정치 보도”
한국 정치 현장을 20년 이상 취재해온 김광덕 서울경제신문 논설실장은 계간(季刊)전문지인 <관훈저널> 2019년 가을호 기고문에서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가 20년 전보다 악화하고 있다”며 이렇게 밝혔다.
“정치 관련 보도는 새롭고 정확한 정보, 깊이있는 해설, 권력 감시와 견제, 실질적 대안 제시라는 네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지금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는 정제된 해설기사가 크게 줄고 청와대와 여·야 정치인들의 브리핑과 막말을 그대로 전하는 ‘발표 저널리즘’에 빠져있다.”
김 실장은 이어 “정치권의 말싸움에 끌려다니는 보도가 많은 것은 취재방식 변화와 취재 열기 저하 때문”이라며 “1990년대까지는 기자들이 새벽이나 밤에 주요 당직을 맡은 정치인 집에 찾아가서 직접 취재를 했으나 지금은 팩트체크(fact check·사실 확인) 조차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에 대한 불만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는 2000년대 초 한 신문 기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정치권의 低質 언어 그대로 지면에 재탕”
“정치면 기사의 태반은 정가 뒷골목 이야기, 가십(gossip), 선정적 폭로물이다. 기사가 공공(公共)의 쟁점이 아닌 사람을 따라다니고 뒷골목 정보 캐내기에 분주하다. 기자들이 정치권 언어 수준의 저질성(低質性)을 그대로 지면(紙面)에 재탕하고 복사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는 <월간조선> 2002년 11월호에서 “기자의 제1 임무는 ‘국민의 뜻’을 정치인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한국 기자들은 거꾸로 활동하고 있다”며 “한국 정치의 실패, 그 절반은 정치부 기자(記者)의 책임이다”고 지적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경과한 지금의 취재 현장은 어떨까?
◇국회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만 1500여명
가장 눈에 띠는 외형적인 변화는 취재 기자와 언론사 수(數)의 증가이다. 정치 취재기자를 통칭하는 국회 출입 기자 수는 1975년 125명, 1993년 366명에서 2020년 11월 현재 480개 언론사에 1515명으로 급증했다(국회사무처 등록인원 기준).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정치 담당 기자들의 주요 취재 대상은 대표, 원내대표, 최고위원, 대변인 같은 20~30명의 당 지도부에 집중되고 나머지 270~280명은 배제되고 있다.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 회원인 김창숙 이화여대 연구교수는 2020년 11~12월 국내 6개 신문사(조선·중앙·동아·한국·경향·한겨레) 국회 출입기자 6명과 통신·방송사 기자 3명 등 총 9명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
취재 방식도 현장과 이해 관계자를 직접 찾아가 만나는 ‘발품 취재(shoe leather reporting)’가 아닌 SNS(소셜미디어)·카톡·텔레그램 등을 통한 채팅, 전화 통화 같은 비대면 ‘손품 취재(finger touch reporting)’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김창숙 교수의 분석이다.
“대부분 인터넷과 SNS 취재로 기사를 작성하는데 단체 채팅방에서 정보와 일정을 공유하고 사실(事實) 확인을 위해 한 기자당 하루 평균 5~10통 통화를 한다. 통화시간은 1~5분이며, 필요한 정보 한 두 개를 얻기위한 단답식 확인 전화가 많다.”
◇‘소모임’ ‘손품 취재’로 기사 작성
기자들이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소모임(組·꾸미)을 만들어 집단취재하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이 소모임은 연차(年次)에 따라 말진, 중간 기자, 반장(班長·각 언론사 최고참 국회 출입기자)급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김 교수의 인터뷰에 응한 9명의 기자들은 모두 “거의 매일 점심에 기자 소모임이나 팀 단위로 국회의원을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나연 성신여대 교수와 김지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김창숙 교수 등 3명은 6개 국내 종합일간지(조선·중앙·동아·한국·한겨레·경향)와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2019년 9월1일~2020년 8월31일 1년치 정치 뉴스 보도를 비교했다. 이나연 교수 등이 속한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에는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를 좌장(座長)으로 30~70대 학자 1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3명의 연구결과에서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①한국 신문의 경우, 취재 대상이 사건(事件)을 단순중계하는 발생 기사가 절반(48%)에 이르고 완전 기획기사는 2.3%에 불과했다. NYT는 발생 기사(6.2%)의 비중은 10% 미만에 불과하며 발생성 기획기사(89.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②취재원 유형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73.8~85.0%)이 NYT(67.0%)보다 높았다. 그러나 자료(資料)의 비중은 NYT(13.6%)가 한국(3.9~6.4%) 보다 배 이상 높았다.
③한국 정치 뉴스의 문장(文章) 수는 평균 16.8개였고, NYT는 43.9개로 두 배 이상 길었다. 또 뉴스 한 개당 인용된 취재원은 한국이 3.5명, NYT는 7.6명이었다. 한 기사에서 비(非)정치인 취재원이 등장하는 빈도는 각각 0.7건(한국)과 4.2건(미국)으로 NYT가 훨씬 많았다.
◇정치인만 등장시켜...단문형 기사가 대부분
한국 신문사들은 NYT의 절반도 안되는 취재원, 그것도 대부분 정치인만 등장하는 짧은 단문형 정치 기사를 양산(量産)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나연 교수는 “NYT는 한국 신문들과 달리 다양한 사례와 자료 등을 바탕으로 기획 형태로 만들며 여러 직종의 비(非)정치인 취재원들의 관점을 담아 정치 기사의 품질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정치 기사의 절대 다수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정쟁(政爭)성 내용이 많다. 또 그날 발생한 정치인의 발언을 중심으로 한 이슈몰이 동타성 기사가 대부분이다. 김창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정치 기사들은 대부분 취재원 1~2명의 발언 하나를 중심으로 작성되기 때문에 종합적인 관점이나 전문가나 시민 취재원 등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포털 사이트에서 많이 읽히기 위해 이슈몰이성 기사가 매일 대량 생산된다. 그 결과 기자들의 전문성 향상은커녕 기사의 품질이 계속 추락하고 있다.”
◇本業인 ‘의원 입법’ 활동은 관심없고 방치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선진화·고도화 흐름을 거스르는 퇴행적인 행태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의 입법 활동에 대한 감시와 견제, 상벌(賞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14대 국회(1992~96년)에 321건이던 국회의원의 발의(發議) 법안은 17대(2004~08년)에 6387건, 20대(2016~20년) 2만3047건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법안 가결률은 37.1%에서 12.5%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정파적 의도를 띤 허술한 의원입법이 남발되고 있지만 언론은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전 KDI 원장)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 의원 입법 활동을 취재 바깥 영역으로 방치하고 있는 게 큰 문제다. 이로인해 의원들의 홍보용 입법 경쟁이 벌어져 매 회기마다 발의되는 법안 건수가 폭증하며, 산업·경제의 혁신에 걸림돌되는 법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언론매체들이 의원 입법의 내용과 과정, 결과 등을 정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전문가 의견 등을 담아 입체적으로 분석·평가해 의원 입법의 수준을 높이고 품질 관리를 해야 한다.”
◇“정치 혐오·냉소 증폭...기자 位相도 떨어뜨려”
한국 언론의 정치 기사가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 반감을 증폭시키고 언론사와 기자들의 사회적 위상(位相)을 실추시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언론사들이 술자리 안주거리 수준에 불과한 정치 보도를 쏟아냄으로써 언론사와 기자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더 키우고 있다”며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라는 오명을 없애려면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옮겨 적는 기사를 벗어나 정치 기사를 다각화, 입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정치 현상의 맥락을 분석하고, 의미를 정리하고, 국민을 주어로 등장시키는 기사를 장려하는 한편, 상임위원회와 정책 소위원회 등 취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수준 높은 정치 분석과 해설 기사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 상승은 물론 기자에 대한 사회적 평판과 대우도 확 바꿀 것”이라고 했다.
◇“‘일’ 중심, ‘쟁점’ 중심으로 기사의 초점 바꿔야”
이재경 이화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는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의 연구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 MBC 기자 출신으로 미국 하와이대와 아이오와대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 교수를 만나 한국 정치 보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들어봤다. 그의 말이다.
“1990년 이후 30년만에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에서 정치 보도(報道)는 아직도 정치인들의 동정이나 행사 참석, 특정 쟁점에 대한 발언 내용 중심에 그치고 있다. 사실상 유력 정치인의 ‘나팔수 역할’을 하며 독자인 시민의 관점과 의견, 글로벌 시각을 배제하고 있는 지금 같은 정치 보도는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한다.”
-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를 총평한다면?
“‘정당 중심 출입과 기사 쓰기로 정파(政派)간 싸움의 정치 구조를 형성하는데 언론이 상당한 부정적 기여를 해오고 있는 게 안타깝다.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을 위한 보도를 줄이고 한국 정치가 선진화될 수 있도록 취재와 편집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이 있나?
“국민은 정치인들이 진정 국민에 필요한 법안을 만들어 국가이익 증대에 건설적으로 기여하도록 언론이 강한 압력을 가해주길 바란다. 그러려면 취재 자체가 ‘일’ 중심, ‘쟁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변인과 정치인들의 억지 논평과 막말 받아쓰기를 줄여야 한다.”
◇“정치인 보다 우수한 시민들 관점 많이 담아야”
- 정치 기사에 시민의 의견과 관점을 반영하자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집권하면 50조원의 예산을 들여 자영업자 지원을 하겠다고 최근 말했다. 그의 발언은 가급적 짧게 보도하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과 분석 등을 전체 기사의 3분의 2 정도로 채우자는 것이다. 시민은 가정주부, 대학교수, 연구원, 기업체 임원, 공무원 등을 망라한다. 정치 보도의 중심을 유권자와 시민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 한국의 정치 보도에서 국민들은 구경꾼이지 않나?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상당수 유권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후보자들보다 전문성과 도덕성이 훨씬 높다. 언론의 역할은 이러한 유권자의 소리를 정치인에게 전하는 방향으로 180도 전환돼야 한다. 유권자인 시민들이 대통령 후보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취재하고 보도하면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에 매몰된 정치인들의 행동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기자들 공부 많이 하고 새 기사 양식 개발해야”
- 바람직한 정치 기자의 모델이라면?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78) 기자는 70대 후반인데도 저녁 늦게까지 취재원 사무실이나 집을 직접 찾아가 만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통령에 관한 책 20여권을 썼다. 우리나라 정치부 기자들처럼 SNS 소모임 방에서 대부분의 취재를 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 정치부 기자들이나 간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더 꼼꼼히 취재하고 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며, 더 깊이있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기사, 독자들에게 우리 정치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면서 시민들이 정치에 더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사유하고,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기사들이 많았으면 한다.”
이 교수는 “기사의 품질이 달라져야 독자의 안목과 기대치도 달라진다. 정치 기사의 품질을 높이려면 기자들부터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새로운 기사 양식을 개발하고 과거의 기사쓰기 관행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