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말 현재 뉴욕타임스(이하 NYT)의 디지털 유료 구독자는 713만명으로 작년 말 대비 반년 만에 44만명 정도 늘었다. 작년 상반기의 디지털 신규 구독자 수(125만명)를 감안하면 증가폭이 크게 둔화됐다. 하지만 올 상반기 NYT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작년 동기 대비 15%, 223% 각각 늘어 더 내실있는 미디어 기업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를 포함해 3년 연속으로 주주(株主)들에게 주는 배당금도 늘렸다.
세계 미디어 업계의 부진 속에서 NYT가 ‘나홀로 질주’하는 이유는 오로지 디지털 전환 성공 때문일까. 이 물음에 대해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이렇게 진단했다.
“저널리즘 기업으로서 세계 언론사들과 차별되는 독보적인 고급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NYT만의 능력이 핵심 원천이다. 특히 전문성을 중시하는 기자 시스템과 이를 키워주는 사내 문화가 본원 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NYT의 기자 시스템은 어떠한가. 5가지 측면에서 이를 분석해 봤다.
◇①대학교수·전문가 능가하는 전문성과 깊이
이미 1974년까지 두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NYT의 민완 기자인 헤드릭 스미스(Hedrick Smith)는 1976년부터 79년까지 워싱턴지국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본사에 복귀해 승진 코스를 마다하고 워싱턴지국 수석기자(Chief Washington Correspondent)로 9년간 더 현장을 누볐다. 백악관 출입 평기자 시절을 포함해 모두 5명의 대통령과 행정부를 워싱턴 DC에서 취재한 경험과 사실을 기반으로 그는 1988년 <파워 게임(The Power Game)>이라는 단행본을 냈다.
‘워싱턴은 어떻게 움직이는가(How Washington Works)’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세계 각국 외교관과 상주특파원은 물론 초선(初選) 미국 연방 의원들과 보좌관, 로비스트들의 필독서로 꼽혔다. 모스크바지국장 근무(1971~73년)후 1976년 쓴 그의 첫 저서 ‘러시아인들(The Russians)’은 그해 미국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16개국 언어로 번역출판됐다. 많은 미국 대학 정치외교학과 수업 시간의 교재로도 채택됐다.
◇기자가 쓴 책, 16개국 번역되고 대학교재로 채택
1989년 공영방송 PBS로 옮긴 헤드릭 스미스는 미국 국내 정치 등 관련 동영상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PD로 변신해 에미(Emmy)상 등을 받았다. 3권의 단독 저서를 추가로 낸 스미스는 만 88세인 지금도 정치 개혁 웹사이트와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며 현역으로 뛰고 있다.
스미스 기자의 만 60년 넘는 ‘저널리즘 한 우물 파기’는 미국 일류 미디어 기업 종사자들에게는 ‘예외’가 아닌 ‘보통’에 속한다. 직업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바탕으로 전문성(professionalism)을 중시하는 기자(記者) 문화와 시스템이 깔려 있어서다.
이완수 동서대 교수(미디어학부)는 “특히 세계 최고 미디어인 NYT에서는 사내에서 ‘직위’와 ‘직책’을 좇아 승진하기 보다는 ‘현장 취재’로 해당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성과 글쓰기 실력을 갖춘 기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1950년대 중반 이래로 정착돼 있다”고 말했다.
◇②직위·직책 보다 현장 취재와 글 쓰기 더 존중한다
일례로 2015년부터 워싱턴지국장을 맡고 있는 엘리자베스 부밀러(Elisabeth Bumiller) 기자는 1956년생으로 올해 만 65세다. 편집취재 부문 최고책임자인 딘 바케이(Dean Baquet) 편집인과 동년배이며, 조셉 칸(Joseph Kahn·1964년생) 편집국장 보다는 여덟살 연상(年上)이다. 부밀러 기자의 사내 직급은 부국장 대우(assistant managing editor)로 한참 낮다. NYT 편집국에는 편집국장 밑에 현재 3명의 부국장(deputy managing editor)과 9명의 부국장 대우가 있다.
워싱턴지국 수석 기자인 데이비드 생어(David Sanger) 역시 1960년 생으로 한국에서는 은퇴 연령이 지났다. 하지만 그 역시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미국 외교정책과 핵, 사이버 무기 같은 전문 분야 취재에 집중하고 있다. 퓰리처상을 두차례 받은 그는 핵무기 보다 더 파괴적인 사이버 무기의 실태를 파헤친 <퍼펙트 웨펀(The Perfect Weapon·2018년)>을 포함해 3권의 전문서를 냈다.
◇1700명 기자 가운데 절반은 취재에만 전념
AP통신을 거쳐 2005년부터 NYT에서 근무하는 최상훈 서울지국장은 회사 기자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언론계에서는 전문기자나 대기자(大記者)들이 각사마다 손에 꼽을 정도지만 NYT는 정반대이다. 1700여명 편집국 기자들 가운데 거의 절반 정도는 데스킹(다른 기자가 쓴 기사를 손보거나 기사 작성을 지시하는 일) 업무나 사내 승진과 무관하게 현장 취재와 기사 작성에 전념하고 있다. 이들은 회사와 본인이 서로 만족한다면, 만 70세를 넘어서도 기사 또는 칼럼을 쓰며 일한다.”
최 지국장은 “나이와 승진에 개의치 않고 자기 분야 또는 더 넓은 자유 분야를 폭넓게 취재하는 이들이 NYT의 경쟁력과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핵심 주역”이라고 말했다.
◇만 76세 前 논설실장, 매주 2회 기명 칼럼 써
칼럼니스트들에게도 이런 기준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NYT의 첫 여성 논설실장을 니냈던 게일 콜린스(Gail Collins)는 1945년생으로 올해 만 76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오피니언칼럼니스트로서 매주 목요일, 토요일에 2회 칼럼을 쓴다.(※NYT에는 사설을 쓰는 논설실 소속원들과 별도로 記名 칼럼을 쓰는 오피니언 칼럼니스트가 15명 정도 있음)
또 다른 현역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인 모린 다우드(Maureen Dowd)와 토마스 프리드먼(Thoms Friedman)은 1952년생과 1953년생으로 각각 만 69세, 68세이다. 작년 말 기준 15명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가운데, 5명은 1940~50년대 출생자이고, 8명은 1970~80년대에 태어났다.
특히 ‘슬레이트(Slate)’ 매거진 정치팀 수석 기자로 있다가 2019년 입사한 자멜 부이에(Jamelle Bouie·1987년생)와 작년 12월 영입된 인터넷 미디어 ‘복스(Vox)’ 편집국장 출신의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1984년생)은 밀레니얼 세대에 속한다.
임현찬 한국외대 교수는 “30대 신예를 과감하게 필자로 발탁하는 것은, 글 솜씨와 시대를 호흡하고 짚어내는 능력만 있다면, 나이와 출신을 묻지 않는 NYT만의 문화와 자신감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③기자 공채 제도 없고’경찰서 의무 훈련’없어
NYT 기자 시스템에서 또다른 특징은 한국과 같은 연도별 기자 공채 제도가 아예 없으며, 입사후 사회부 경찰기자를 필수 훈련 과정으로 운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자들 가운데는 대학 재학시절 학보사 편집장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거나 인턴 또는 사내 저널리즘 아카데미 우수자로 직접 채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압도적인 다수는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월스트리트저널(WSJ) 같은 경쟁지에서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아 스카웃되는 경우이다. 실제로 NYT의 현재 편집인(executive editor)과 편집국장(managing editor), 오피니언 에디터(우리나라의 주필급)는 모두 다른 언론사 출신이다.
딘 바케이 편집인은 시카고트리뷴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NYT에 스카웃됐으나 LA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외도했다가 NYT에 다시 복귀해 편집국장을 지냈다. 조셉 칸 편집국장은 지방지 출신으로 WSJ 베이징특파원으로 일했었다. 캐슬린 킹스베리(Kathleen Kingsbury) 오피니언 에디터는 2017년 NYT에 오기 전에 ‘타임’지 홍콩특파원과 보스턴글로브 디지털 국장을 지냈다. 그녀는 입사 3년 만인 작년 말 논설실 최고 책임자가 됐다.
최상훈 서울지국장은 “NYT에도 경찰 기자(police beat) 포스트가 있지만 경찰서 근무 및 취재를 초임 기자들 훈련 과정으로 절대 운영하지 않고 있다”며 “편집국은 검증받은 숙련된 기자들의 집합체이며, 회사는 이들의 전문성과 프로의식을 최대한 존중한다”고 말했다.
◇④인사 교류 없이 독립 운영하는 편집국과 논설실
편집국 기자들과 논설실간에 높은 장벽이 쳐져 있는 것도 한국 언론사들과 다르다. NYT의 경우 논설실에서 내일 아침자에 누가 어떤 사설을 쓰는지, 편집국에 알려주지 않고 편집국 어느 누구도 이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논설실원이나 칼럼니스트가 현안에 대한 사설이나 칼럼을 쓸 경우, 독자적으로 또는 유료 리서처(researcher)에게 맡겨 사실 확인을 하며 편집국 기자들에게 연락해 묻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박재영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는 “NYT의 논설실과 편집국은 서로 정보 교류나 인사 교류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며 “이를 통해 NYT는 취재와 오피니언 영역 고유의 독립성을 확보하며 이용자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 편집국 기자들은 ‘News Analysis’ ‘On Washington’ ‘White House Memo’ ‘Critic’s Notebook’ ‘Media Equation’ 같은 자기 부서 코너를 통해 현장 취재에 기반한 칼럼성 기사를 쓰고 있다.
◇⑤퇴임후 80세 넘어도 칼럼 쓰는 전통
마지막으로 NYT에서는 기자 출신으로 간부를 지냈더라도 간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다시 칼럼니스트로 글 쓰기에 매진하는 게 불문율이자 전통이다. 편집국장(1970~76년)과 편집인(1977~87년)을 지낸 A.M. 로젠탈(Rosenthal)은 퇴임한 1987년 1월부터 만 77세가 된 1999년말까지 ‘On My Mind’라는 기명 칼럼을 매주 2차례 NYT에 썼다.
‘NYT의 기둥’으로 불렸던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은 편집인 재임 기간(1968~69년)에도 칼럼을 쓰기 위해 매주 1~2회 워싱턴DC로 출퇴근했다. 그는 만 80세까지 미국 전역에 공급되는 신디케이트 칼럼을 썼다. 그러다 보니 NYT의 최고경영자(CEO)나 최고운영책임자(COO), 최고기술책임자(CTO) 같은 임원 자리는 대개 전문 경영인이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맡고 있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NYT의 디지털 전환을 지휘한 마크 톰슨(Mark Thompson) CEO는 영국 BBC 방송에서 8년간 최고경영자를 맡았었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는 “전문성과 업(業)에 대한 열정을 중시하고 배려하는 NYT의 기자 시스템이 고급 저널리즘을 창출하는 원동력”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전문성에다 뛰어난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기자들이 많이 있음으로 인해 지식인을 포함한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NYT라는 기업과 NYT 소속 기자들을 존경하고 대우(待遇)해 주는 풍토가 형성되고 있다. 복합 위기에 처한 한국 신문사들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참고한 자료 : 뉴욕타임스의 디지털 혁명(송의달), 탁월한 스토리텔러들-미국 기자들의 글쓰기 노하우(이샘물·박재영), The New York Times Company Reports 2020~2021 Second-Quarter Results, The New York Times Company 2018~2020 Annual Report, www.nytco.com/, https://en.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