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다란 나무였으나
지노 스워더 글·그림 | 신수진 옮김 | 씨드북 | 52쪽 | 1만6800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날이 이어졌다. 그림 작가는 책상 앞에 얼어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떨굴 때,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이 소곤소곤 말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처음엔 땅속 작은 씨앗이었어. 몸을 찢어 잔털뿌리를 내며 햇빛 방향으로 뻗어 나갔지.” 땅 위로 나와 만난 숲속 세상은 조용한 생기로 가득했다.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꿈꾸고, 낮엔 바람에 흔들리며 춤췄다. 어엿한 나무로 자랐을 때, 이파리 아래 비를 피하던 작은 친구 ‘떠돌이’가 말을 걸었다. “언젠가 너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될 거야.”
계절은 순환했다. 숲의 평화는 영원할 것 같았다.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에 새잎이 자랐어. 땅속 벌레들은 내 뿌리 주위에 모여 살았고. 내 가지 위에서 애벌레는 나비가 되고, 둥지 속 새끼 새는 어미와 함께 날아올랐지.”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난 어느 가을, ‘떠돌이’가 달려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인간들이야, 인간들의 기계가 올 거야! 하루면 닿을 거리야!”
별들이 천천히 맴돌던 밤하늘. ‘떠돌이’가 마지막으로 불러주던 새의 노래…. 아름드리 나무들이 선득선득 잘려나갔다. 숲은 폐허가 됐다. “그렇게 나는 수천 가지 물건이 됐지. 목마, 체스 말, 괘종시계, 성냥, 그리고 지금 여기, 연필.”
“이제 몽당연필이 됐구나. 이야기를 마쳐야겠네.” 작가는 몽당연필로 “끝.”이라고 쓴 뒤 다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지만, 나무와 ‘떠돌이’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려나간 나무 등걸 위에, 여전히 제 속에 나무이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몽당연필에게, ‘떠돌이’가 찾아온다. 이제, 다시 숨 쉬며 살아나 숲을 되돌릴 시간이다.
파괴의 환멸을 딛고 스스로 회복하는 자연의 힘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연필의 목소리를 빌려 들려주는 책. 아주 작은 요정 같은 ‘떠돌이’는 약해 보이지만 쉬이 물러서지 않고, 슬퍼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숲도 자연도 ‘떠돌이’처럼 그러할 것이다.
작가가 자란 호주 남부 빅토리아풍 소도시 벤디고의 동네 길 끝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었다. 집엔 차도, TV도 없었고, 작가는 나무에 오르고 말을 걸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 책이 따른 것은 드넓고 풍요로우며 서로 연결돼 있는 자연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의 발자국”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