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외투가 무색하도록 몰라보게 따스해진 날씨. 봄이 오고 있습니다. 김경미 이화여대 교수와 홍인숙 홍익대 교수가 옮긴 허난설헌 시문집 ‘난설헌, 나는 쓴다’(나의 시간)를 펼쳤습니다. 봄을 읊은 시에 눈길이 닿는군요.

“고요한 뜨락엔 살구꽃 비에 지고(院落深沈杏花雨)/목련꽃 핀 언덕에선 꾀꼬리 운다(流鸎啼在辛夷塢)/오색 술 늘어진 비단 휘장에 봄 한기 스미는데(流蘇羅幕襲春寒)/한 줄기 향 박산향로에 가벼이 흔들린다(博山輕飄香一縷).”

박산(博山)은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이 살고 있다는 산이고, 박산향로는 박산 모양의 뚜껑이 있는 향로로 한나라 때 유행했답니다. 꽃과 새를 노래한 시인은 이내 사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잠에서 깬 미인은 화장을 새로 하고(美人睡罷理新粧)/향기로운 비단옷에 원앙 수놓은 보석띠 두르네 (香羅寶帶蟠鴛鴦)/두터운 주렴 비스듬히 걷고 비취 휘장 내리고(斜捲重簾帖翡翠)/나른하게 은쟁 안고 봉황곡 타는구나(懶把銀箏彈鳳凰).”

‘쟁(箏)’은 거문고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현이 13개인 악기라고 합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시인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입니다. 15세 때 혼인했는데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고, 남매를 두었으나 모두 잃었으며, 본인은 27세에 요절했습니다. 봄처럼 짧은 삶이었죠.

이 시는 화자가 아지랑이 속으로 말을 몰아 떠나는 님을 난간 위에서 내려다보다, 외롭고 쓸쓸한 밤을 이야기하며 끝이 납니다.

“누구네 집 연못가에 피리 소리 흐느끼나(誰家池館咽笙歌)/달빛은 아름다운 금 술잔 비추는데(月照美酒金叵羅)/시름 많은 사람은 홀로 잠 못 이루니(愁人獨夜不成寐)/새벽이면 비단 수건에 붉은 눈물 자국 가득이네(曉起鮫綃紅淚多).”

아름다운 풍경과 내면의 슬픔이 대비되어 처연함을 더합니다. 이 봄은 또 어떤 기쁨과 슬픔을 우리에게 안겨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