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쓴단 말인가. 올해 이보다 더 강렬한 주인공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새해 첫 책인데 성급한 판단이 아니냐고? 글쎄다. 나중을 위해 지금의 사랑을 아낄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이 소설, ‘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자음과모음) 배경이 되는 ‘정신평등주의’에 따르면 내가 쓴 문장들은 죄다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평등해야 하니 특정인에 대한 찬사는 위험하다. ‘느린 음악’이라는 표현을 ‘굼뜬 음악’으로 바꾸는 시대다. 부엌에서도 ‘닭대가리’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고 ‘돼지’나 ‘호박’도 마찬가지다. “무생물의 감정도 존중해야”(202쪽) 하기에 수영장에서도 ‘깊은’ 쪽을 ‘물이 많은’ 쪽이라 표현한다. ‘대안적 프로세스’를 끊임없이 강요받는 상황에서 주인공 피어슨은 증기 배출구가 막힌 채 가열되는 압력밥솥을 떠올린다.

아인슈타인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 것도 혐오 발언처럼 통한다. 얼간이와 만물박사는 평등의 근간을 흔드는 설정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굿 윌 헌팅’도 ‘셜록’도 안 되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특히 그 책은…, 제목만으로도 불온서적이 될 것이다. 대학 강사 피어슨이 바로 그 제목을 칠판에 적었을 때 학생들이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일. 피어슨은 곧 정신평등처로 불려간다. (그 책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

폭풍은 집으로도 닥친다. 피어슨이 막내 루시에게 멍청하다고 말해서 아동보호국에서 조사를 나온 것이다. 엄마로서 세 아이를 사랑하지만, 정자를 선택해 낳은 두 아이에 비해 막내 루시는 확실히 “따분했다”. 기증자 명단에서 지능이 높은 사람을 골랐던 것이 알려지면 비난받겠지. 그래도 피어슨은 후회하지 않는다. 왜 탁월한 게 탁월하다고 말을 못 하나, 어째서 에둘러 안전한 화젯거리만을 찾아야 하나. 30년 지기 에머리도 그런 피어슨을 안다. 그래서 멀어지는 중일 수도 있고.

소설은 시작부터 우정의 균열을 보여주는데, 다 읽고 나면 초반부는 비교적 순한 맛이었음을 알게 된다.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사각의 링 위에 올라간 것처럼 설전을 벌인다. 주객 전도의 비극과 사회적 광기를 통쾌하게 비꼰 소설이다. 저자 슈라이버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 원작자이기도 하다.

윤고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