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드그렌의 1942년 1월 1일 일기. 그는 “올해가 끝나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그때까지도 인류가 갈구하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을까?”라고 썼다. 왼쪽 페이지에 루스벨트, 히틀러, 처칠(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사진을 오려 붙였다. /시공사

린드그렌 전쟁일기 1939-194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이명아 옮김|시공사|640쪽|3만2000원

지난해 12월 노벨문학상 시상식 참석차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한강은 바쁜 일정 중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생전 살던 집을 찾았다. 린드그렌의 증손자인 요한 팔름베리도 만났다. 수상자 발표 직후 한림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강은 “어렸을 때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1973)을 무척 좋아했다”며 “그가 내 어린 시절에 영감을 준 유일한 작가라곤 말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책을 인간이나 삶, 죽음에 관한 나의 질문들과 결부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말괄량이 삐삐’ 린드그렌 집 찾은 한강 - 지난 8일(현지 시각) 스톡홀름에서 ‘말괄량이 삐삐’로 잘 알려진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살았던 집을 방문한 한강. 손에 든 책은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는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 /노벨 위원회

린드그렌이 2차 세계대전 중인 1939~1945년 17권의 노트에 적은 일기가 번역돼 나왔다. 올해는 린드그렌의 대표작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 출간 80주년. 린드그렌은 중립국 스웨덴에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누리면서도 전쟁의 살육에 분노하고, 어머니이자 ‘쓰는 인간’으로서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린드그렌 전쟁일기'. /시공사

1939년 9월 1일,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오늘 전쟁이 일어났다. (…) 하나님, 광기가 몰아치는 우리 행성을 지켜 주소서!”라는 탄식으로 시작한 이 일기는 소련군이 헬싱키 등 핀란드 몇몇 지역을 폭격한 그해 11월 30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성경 속 예수의 비탄을 되풀이하며 이어진다. 히틀러가 베네룩스 3국을 침공한 1940년 7월 21일엔 이렇게 썼다. “독일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로운 희생 제물을 끌어내리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사악한 괴물 같다. 20년마다 인류 전체를 적으로 몰고 가는 민족이라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전쟁 당시 린드그렌은 유명 작가도 아니었고, 남들 눈엔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지만 전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범죄학 연구소에서 형법학자 하뤼 쇠데르만의 조수로 일했던 인연으로 1940년 스웨덴 중앙정보기관의 검열관으로 취직해 스웨덴과 다른 나라 사이를 오가는 서신 수만 통을 검열했다. 이해 9월 21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달 15일부터 비밀 ‘비상 업무’를 시작했다. 너무 조심스러워 이 일을 여기에 적을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다.”

린드그렌의 1940년 7월 21일 일기. 독일제국의회에서 발언하는 히틀러 사진과 함께 "그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말할 수 있겠지. Sic transit gloria mundi(이렇게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는구나)"라고 적었다. /시공사

린드그렌은 전쟁을 다룬 신문 기사, 사설, 자신이 검열한 편지 일부 등을 스크랩해 일기장에 붙였다. 1940년 7월 21일엔 독일제국 의회에서 발언하는 히틀러 사진을 오려 붙이곤 적었다. “세계의 지배자-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 한때는 초라한 무명의 독일 수공업자, 민족의 재건자,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보기에) 문화 파괴자이자 몰락의 주범. 그의 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말할 수 있겠지. Sic transit gloria mundi(이렇게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는구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 며칠 후인 1942년 1월 1일 일기에는 루스벨트, 처칠, 히틀러의 사진과 함께 썼다. “나란히 서 있는 저 세 남자가 새해에 무엇을 바라는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히틀러는 잠 못 드는 밤들을 보내는 것 같고, 처칠은 슬프고 근심에 휩싸인 모습이다. 루스벨트만 미국인다운 낙관적인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은 일본이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촬영됐을지도 모른다.”

생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모습.

‘삐삐 롱 스타킹’은 1941년 폐렴으로 앓아누운 딸 카린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어른들이 만든 질서를 거부하는 당돌한 소녀 삐삐를 린드그렌은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작은 초인(超人)”이라 해석했다. 삐삐가 히틀러와 이름이 같은 곡마단 거인 ‘아돌프’와 힘겨루기를 해 이기는 장면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인류의 정신을 어린이의 순수함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희망으로도 읽힌다.

2차 대전 동안 린드그렌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남편의 불륜으로 고통받던 그는 1944년 8월 2일 일기에 쓴다. “독일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 삶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성탄절엔 이렇게 적었다. “어쨌거나 나는 무언가를 배웠다.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두 자녀, 카린과 라르스. 불카누스가탄의 아파트 앞에서, 1940년. /시공사

1945년은 종전과 함께 린드그렌이 개인적인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은 해였다. 남편 스투레가 용서를 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마지막 날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내게도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나와 우리 가족 모두! 그리고 전 세계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지만 너무 무리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좋은 새해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더 나은 새해가 될 수는 있을 거다.”

생생하고 인간적인 전쟁의 기록이지만 린드그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에겐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책이다. 덴마크 작가 옌스 안데르센의 린드그렌 평전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창비)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린드그렌의 눈으로 2차 대전을 읽어 가다 보면 한강이 수상 기념 연설에서 던진 질문,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의 답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