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마법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한경희 옮김|문학동네|244쪽|2만3000원
올 상반기 뉴욕에서 가장 화제가 된 전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2월 8일부터 5월 11일까지 열린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자연의 영혼’이다. 독일 낭만주의 거장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 회고전으로 독일 미술관 세 곳과 협력해 회화 및 드로잉 88점을 선보였다. 그간 미국서 열린 프리드리히 전시 중 최대 규모다. 총 관람객 30만 명. 뉴욕타임스는 “풍경화라는 장르의 가치를 강하게 옹호한 전시”라면서 “프리드리히의 풍경에는 이전까지 없던 쓸쓸함의 응축이 있다”고 평했다.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이 생소한 독자라도 메트 전시 포스터로 쓰인 대표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7)는 한 번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짙은 녹색 벨벳 코트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바위 위에 올라 운무(雲霧)를 내려다보고 있는 뒷모습. 이 그림은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앨범 재킷으로 즐겨 활용되며,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뒷모습과 결합돼 여러 패러디를 낳았다. 이 고독한 방랑자가 ‘독일’의 은유가 되면서 프리드리히 역시 독일 정신의 총체를 그린 화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독일 출신으로 본 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미술사와 근대사를 공부한 저자는 프리드리히의 작품이 세간에 잊히고 기억되면서 역사에 의해 굴절되었다가 제자리를 되찾는 과정을 여러 시점을 오가며 세밀하게 그려낸다. 비누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열세 살 때 동생을 잃은 이 내향적이고 금욕적인 화가는 코펜하겐에서 유학한 후 드레스덴에 정착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서구 전통에서 경시되던 풍경화에 영적인 깊이를 부여해 종교화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해 재구성함으로써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 이미지를 캔버스에 펼쳤다. 이성이 지배하던 계몽주의자들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사랑했다. 사뮈엘 베케트는 1937년 드레스덴의 미술관에서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썼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외톨이 나무’에 반해 1905년 그에 대한 시를 읊었다. 월트 디즈니는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차용해 ‘밤비’(1942)의 풍경을 그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프리드리히 사후 100년이 지났을 무렵 나치가 그의 그림을 ‘게르만 정신’과 동일시하며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프리드리히는 1824~1825년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인 바츠만산을 화폭에 담았다. 바츠만산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지만 지인들의 그림을 모델로 해 그리면서 오래된 스케치북에 있던 다른 산의 암석을 단지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로 바츠만산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를 사실적인 풍경화로 오인한 히틀러는 1937년 베를린국립미술관이 유대인 사업가에게서 ‘바츠만산’을 구입하도록 1만 마르크를 지원한다.
프리드리히는 신(神)을 추앙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숭고한 이상으로서의 자연을 그렸지만 히틀러는 이를 게르만-알프스적인 과대망상이 담긴 꿈을 펼칠 장엄한 무대로 이해했다. 괴벨스는 프리드리히를 일컬어 “셰프(히틀러)가 특별히 사랑하는 화가”라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의 작품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소비되었을 때 후대는 그 예술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과거와의 단절을 기치로 내세운 독일의 68세대는 프리드리히를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했다. 프리드리히는 “역사를 주도할 능력이 없었고” “수동성과 역사의 순리에 대한 믿음 속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에서 농민들이 안개처럼 들판을 떠돌고,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세상사 대신 하늘이나 바라보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자기가 속한 소시민계급의 수동성을 이념적으로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얼토당토않은 궤변”이라며 배척한다. “프리드리히가 그린 인물들의 수동성은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그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바로 그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나름의 눈을 갖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전작 ‘1913년 세기의 여름’(2013)으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저자는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특유의 문체로 프리드리히의 화폭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단 도판이 네 점밖에 실려 있지 않은 점은 미술사에 조예가 없는 독자들에게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원제 Zauber der Sti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