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책
앤드루 페테그리 지음 | 배동근 옮김 | 아르테 | 704쪽 | 4만5000원
1933년 나치 당원과 학생들이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 광장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책을 던져 넣었다. 괴벨스는 당시 비독일인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나치적 책들을 불태우자”고 했다. 마르크스, 루터 같은 사상가부터 에밀 졸라, 카프카 같은 소설가까지 약 1만8000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끄집어내 불태웠다. 세계를 경악시킨 ‘베를린 분서’ 사건. 두 차례 세계대전 동안 각국 도서관에서 수백만 권의 책이 소실됐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세계의 장서가 무너지는 걸 보며 “사람은 죽지만 책은 결코 죽지 않는다. 어떤 무력도 책의 사상을 영원히 가두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책은 전쟁의 피해자 같다. 하지만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에서 책과 미디어를 연구하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전쟁에서 책의 속성은 입체적이라는 것. 이 책은 “책이 전쟁의 비극적 희생물이기 쉽다는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는 말로 시작한다.
전쟁에서 도서관을 파괴한다는 건 적대국 시민사회의 심장을 꿰뚫는 행위였다. 패전국에 상징적인 굴욕을 안길 수 있었다. 기능적인 의미도 있다. 도서관이 사실상의 주요 ‘군수 기지’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양상이 정보·과학전으로 흘러가던 당시 도서관에 책 형태로 소장된 지식은 그 자체로 군사력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의회도서관장이었던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1945년 “현대전을 도서관 자원 없이 치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훗날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물리학자 게오르기 플료로프는 1941년 핵 분열 연구를 위해 지역 대학도서관을 다니다 독일·미국·영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어느 순간부터 핵물리학 논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걸 보고 해외 연구자료들이 기밀 취급되고 있다는 걸 알아 챈 것. 플료로프는 바로 스탈린에게 “우리도 원폭을 빨리 개발해야한다”고 편지를 쓴다.
과학자들은 무기·통신 기술을 위해 도서관에 쌓여 있던 과학 정기간행물과 특허 기록들을 샅샅이 뒤졌다. 사서와 스파이까지 동원해 적국의 기술 문서를 수집하고 해독하기도 했다. 지도의 역할도 컸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노르웨이 해안을 점령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세울 때 여행 책까지 참고했다.
책은 선전전의 무기가 되기도 했다. 병사와 국민에게 애국심을 주입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마오쩌둥의 어록집 ‘작은 빨간 책’ 등은 국가주의 집단을 만들어 냈다. 애독가였던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책의 힘을 진작 알고 있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당대 유명한 장서가였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집과 시골 별장에 책 1만5000권가량을 보유했을 정도. 마오쩌둥은 아예 도서관 사서 출신이다.
가장 파급력이 강력한 장르는 ‘시’였다. 내용이 짧은 데다 반복해서 읽기도 좋았다. 이 때문에 전쟁이 터지면 시단(詩壇)은 반으로 쪼개졌다. 한쪽에선 군국주의에 빠져 전쟁을 찬양하는 시가 나왔다.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오로지 전쟁만이 썩어 빠진 이들의 타락상을 멈출 수 있다”고 썼다. 다른 쪽에선 투쟁의 수단이 됐다. 이른바 ‘불온한 시’로 적발되더라도 시치미 떼기도 좋았다. 1942년 시인 막스폴 푸셰는 폴 엘뤼아르의 시 ‘단 하나의 생각’에 대해 “자유를 향한 외침이 아니라 사랑을 읊은 시”라고 검열관을 설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출판사는 선전 기구가 됐다. 지조 있는 출판사는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당시가 출판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영국의 W H 스미스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점포 223곳과 가판대 1500곳에서 독일군을 악마화하는 선전물 1억 부가량을 배포했다. 나치는 점령지 군인들에게 나치즘을 강화하는 책을 뿌렸다. 1940년엔 2억4200만권, 1941년엔 3억4200만권을 출판했다.
독자들도 책을 계속 원했다. 병사들은 두려움을 이겨내려 책을 펼쳤다. 책이 새카매져서 더는 읽을 수 없을 때까지 읽었다는 미국 병사의 기록도 있다. 후방의 국민은 요리책 등을 사며 일상을 살아냈다. 가장 책이 인기를 끈 곳은 포로수용소다. 한 연합군 장교는 독일 포로수용소 생활 5년 동안 책 350권을 읽었다. 다른 장교는 “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그 덕에 주목받지 못했던 명작이 수면 위로 올랐다. 출간 당시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진중문고 판을 계기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반대로 주목받아야 할 명작이 나오지 못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소련 스파이의 방해로 출판사를 한참이나 찾지 못했다.
저자는 ‘전쟁과 책’이라는 거대한 두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일반 도서뿐만 아니라 소녀의 일기 같은 작은 기록물부터 잡지, 전단, 논문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