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 열흘까지 쉴 수 있는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여유 있게 책 한 권 독파하기에 충분히 넉넉한 시간이다. Books는 문학·인문 교양·어린이 등 분야별 출판 편집자 5명에게 ‘긴 연휴를 기회로 읽어보면 좋을 책’을 두 권씩 추천받았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작가가 쓴 원고의 첫 독자인 동시에 함께 책을 만드는 그림자 저자이며, 365일 책과 붙어 사는 책의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건넨 리스트에는 지쳤던 나에 대해, 불완전한 세계에 대해, 잊고 있던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보석 같은 책들이 담겼다.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책도 있다. 이제 책을 읽을지 말지는 여러분 몫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추석 명절 연휴가 되기를 기원한다.
형언하는 몸
김호경·이하림·한송희 지음 | 아침달
열심히 살아도 불안한 사람들
랄리타 수글라니 지음 | 박선령 옮김 | RHK
추석 연휴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 몸이다. 긴 귀성길을 이동하는 몸, 휴식하는 몸, 맛있는 것을 잔뜩 먹는 몸, 평소와 다른 길을 걷는 몸. 몸이 주는 감각에 의해 기분이 달라지고, 하루를 느끼는 일도 시시각각 바뀐다.
‘형언하는 몸’은 세 문화 연구자가 몸에 얽힌 삶과 예술적 시선을 비평의 양식으로 차곡차곡 교차하여 쌓아 올린 에세이다. 몸에 대해 새롭게 의식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은 문이 열리는 몸이라니. 읽는 몸, 듣는 몸, 보는 몸, 쓰는 몸. 다채로운 감각이 비평을 통해 ‘살아가는 몸’의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 흥미롭다.
몸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세상을 엿듣고 있으며, 살아갈 날의 힌트를 알려준다. 이 책은 한 잔의 영혼이 담긴 몸이 다양한 감각으로부터 어떻게 출렁이는지, 또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삶에 발현되는지 이야기한다. 긴 연휴에 만나보기 좋은 책이다.
한편 추석 연휴가 주는 잠깐의 ‘신호 대기’ 속에서 우리는 생각해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살았을까. 열심히 살아도 채워지는 느낌 없이 공허한 상태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고기능성 불안장애(HFA)’로 진단하는 책이 있다. 제목이 직설적으로 말하듯, 이 책의 독자도 ‘열심히 살아도 불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모른다. 열심히 사는 일만 무의미하게 반복하며 자신을 소진할 뿐이다. 그러나 그 불안의 고향을 알게 된다면? 쉬는 일도, 열심히 하는 일도 달라질 수 있다.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의미 없이, 그저 열심히 하는 일에 심취했던 현대인이라면 이 책을 눈여겨보길 바란다. 어쩌면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내면 깊은 곳에 불안함이 들끓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책은 무엇도 강권하지 않는다. 대신 알아준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차리게 하고, 나의 몰랐던 나를 읽어준다. 쉬었으나 쉰 것 같지 않고, 열심히 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읽어주는 당신에 대해 귀를 기울여볼 차례다.
/서윤후 아침달 편집자·시인
은수저
나카 칸스케 소설 | 정수윤 옮김 | 휴머니스트
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품집
고선우·이연파·최장욱 소설 | 허블
근래 가장 좋았던 소설인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엔 화자의 불퉁하면서도 순정한 유년 풍경이 드러나는데, 그 생각과 묘사의 언어를 읽고 있으니 너무나 황홀하였다.
그 시절의 놀이와 풍습, 사고방식에 대한 소상한 인류학적 민속지라 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이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새끼 참새야, 하고 부르며 수저로 음식을 떠먹여 주었던 이모. 가여움을 품으며 동물과 인간 사이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 이모. 그 이모의 영향 아래 성장하며 아이의 마음은 도타워진다.
그리고 읽으면서 껄껄껄 낄낄낄 소리 내 웃었던 장면. 소설 중반 즈음 더 자라 소년이 된 화자는 형과 밤길을 걸어간다. 걸음이 늦다고 형이 타박하자, 화자는 “별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이 “멍청아, 별님이 뭐냐. 별이라고 해” 핀잔을 주자, 화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여운 인간아. 어떠한 인연으로 지옥의 길동무가 된 이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듯 하늘을 도는 차가운 돌을 어린아이의 동경 어린 마음에서 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일까.”
돌이켜보면 추석은 아이 때 황홀했다. 그 유년에 더욱 가까이 지냈던 이모와 삼촌들. 친척 누나, 형, 동생들을 기다리며 콩닥콩닥했던 마음. 그렇기에 이 아름다운 소설을 추석이 다가오는 즈음 추천하고 싶다.
한편 다 커버려 추석의 복작복작함을 외려 탈출하고 싶다면 SF 소설을 읽어보시라. 이 시공간을 떠나 자유로움을 감각할 수 있는 SF의 세계. ‘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그와 맞춤한 책이다. 이 가뜬한 한 권에서 SF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다. SF 서정과 SF 인류학과 SF 게임 세계와 SF 누아르와 SF 비가(悲歌)…. 그 모든 SF의 광활한 어떤 것들. 2025년 당대를 가로지르는 SF.
한국과학문학상은 김초엽, 천선란, 청예 등 SF 문학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이름들을 발굴했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미래에 더 널리 알려질 이름들을 먼저 읽는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안태운 동아시아 편집자·시인
키오스크 학교
이서아 소설 | 민음사
동네 공원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설 |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긴 연휴를 앞두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저런 딴생각만으로 시간을 보내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길어지다 보니 공상다운 공상을 한 적이 언제인지 아득하다. 공상에도 어떤 자격이 있다면, 일단 일상의 마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볼 수 있겠다. 그러려면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테고, 책은 그 일시적인 작별을 돕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준다. 연휴 전, 공상으로의 진입을 돕는 책 두 권을 추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책은 이서아의 첫 번째 장편소설 ‘키오스크 학교’다. 근미래의 대한민국, 갈 곳 없는 아이들은 세상에서 쓰임받기 위해 ‘키오스크 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서는 우정, 사랑, 슬픔, 기쁨과 같은 감정이 효율성과 생산성에 심히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아이들에게 이 모든 것을 소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소설 내용이 마냥 미래의 일로만 읽히지는 않는 것은, 당장 오늘 내가 감춘 감정들만 하여도 다 셀 수가 없는 탓이다. 공상이 있는 휴일로 돌입하려면 효율성의 방향보다는 그간 감춰 온 감정의 방향으로 걸어야만 할 것이다. ‘키오스크 학교’가 꼭 이쪽으로 가세요, 하고 말해 주는 것 같다.
두 번째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대화체 소설 ‘동네 공원’이다. 제목처럼 ‘동네 공원’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의 우연한 대화로 구성된 작품이다. 한 사람은 보모 일을 하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희망하는 젊은 여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잡동사니를 판매하는 중년 남자이다. 한가로운 공원에서 벌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의외로 날카롭고 때로는 서로의 삶의 태도를 전면으로 반박하며 공격성을 띠기도 한다. 이들의 대화를 가만 따라가다 보면 생각은 곧 내가 가진 삶의 태도는 어떠했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답 없이 이어지는 생각, 즉 공상을 이어 가기에 이만한 책도, 이만한 연휴도 드물 것이다.
/정기현 민음사 편집자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달력을 보다 흠칫 놀랐다. “온다, 온다” 했던 ‘황금 연휴’가 코앞에 와 있었다. 한동안 세상도 마음도 시끌시끌했다면, 이번 연휴에는 생각의 리듬을 재정렬하고 시간의 더께 위에서만 가능한 깊은 독서의 경험을 해보는 게 어떨까. 소개할 두 권의 책은, 한 권 안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이어져 너덧 권을 읽은 듯 지적 충만함에 거(居)하게 한다.
프랑스 중남부의 작은 고원, ‘비바레리뇽’ 이야기부터 해보자. 인류학자 매기 팩슨은 매일 들려오는 참혹한 소식에, 크고 작은 슬픔의 물결에 “툭 부러져 버렸다”고 느낀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군인을 피해 도망친 유대인과 어린이를 구해낸 비바레리뇽 주민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망명 신청자를 보호하며 거처를 제공한다. 많은 악이 횡행하는 시대에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선’을 행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미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 고통을 더 보태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건넨다. 종내 돌고 돌아 ‘사랑의 행위’로 귀결된다. “우리는 반드시 서로를 사랑해야 해요. 그게 다예요.” 회고와 역사적 탐구와 철학적 고찰이 절묘하게 엮인 ‘비바레리뇽 고원’을 읽다 보면 눈물이 뚝뚝 흐른다.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된 시대, 선함의 뿌리를 탐구하는 귀하고 중한 문장이 빼곡하다.
아름답고 서정적이면서도 끈질기게 사유의 문을 열어젖히는 문장의 향연은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에서도 이어진다. 20여 년간 ‘옮기는 일’에 매진해 온 홍한별이 과연 그 ‘옮기는 일’이란 무언지 소상히 그려낸다. 번역이라는 업과 언어 세계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탐험하는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혼란”이라고 말하는 이 책은 풍성한 사례를 들어 언어와 언어, 의미와 의미 사이를 구불구불 성심껏 헤쳐 나간다. 번역의 기쁨과 슬픔은 물론 무수한 시도와 고투와 포기와 회의와 도전을 말한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성실히 머무른 직업인이 비로소 들려주는 이야기에 일종의 경외심마저 든다. 좋은 책을 읽었다는 정직한 감상이 찾아온다.
책장을 덮고 우리 발붙인 땅으로 되돌아왔을 때, 독자들은 다시금 분주한 일상에서도 그간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계를 눈 비비고 새로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으면서.
/정혜지 생각의 힘 인문사회 편집팀장
호랭떡집
서현 글·그림 | 사계절
여름이 오기 전에
김진화 글·그림 | 문학동네
일주일이 넘는 연휴가 시작된다. 어릴 적 명절이 다가오면 늘 기뻤다. 오랜만에 사촌들과 다 같이 모여 놀 수 있고, 외가에 가는 길에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어서였다. 요즘 어린이들은 어떤 설렘을 갖고 있을까? 별다르지 않을 것 같다. 모여 노는 재미와 여행의 기분. 그래서 두 책을 골랐다.
서현 작가의 ‘호랭떡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을 쏙 빼며 놀아 줄 그림책이다. 지옥의 요괴들, 옛이야기 변주 등 아이들이 열광할 요소가 그득하다. 제목이 ‘호랭떡집’인 만큼 송편, 인절미, 약과, 시루떡, 쑥개떡…. 떡이란 떡이 다 나와 ‘떡요괴’로 등장한다. 배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 저승의 모습과 닮은 지옥이다. 옛이야기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며 행패를 부린 호랭이(호랑이)가 업보를 받는 듯하다. 장난꾸러기 떡요괴들과 놀아 주다 혼이 나간 호랭이에게 명절날 삼촌의 모습이 겹친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건강한 도파민을 맛볼 수 있다.
김진화 작가의 ‘여름이 오기 전에’는 제목이 주는 계절감보단 여행의 소회를 다룬 그림책이다.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가 가장 설레고, 여행지에서 돌아가는 길은 또 그렇게 센티할 수가 없다. 일상으로 돌아간대도 매일매일이 즐거울 것만 같은 어린이들도 여행의 소중함과 아쉬움을 안다. 책을 열면 공항 풍경에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다 주인공 아이가 애착 인형을 잃어버리고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는 엄마가 모르는 사이에 여행에서 무언가 달라진 감정을 느낀다. 이 책에선 무엇보다도 그림책만이 선보일 수 있는 글과 그림의 대위가 감각적으로 읽힌다. 아이의 목소리가 글로 흐르는 가운데 그림은 인형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 흐름이 주는 묘한 감상을 쫓아가다 보면 놓치고 살던 추억 하나를 건질 수도 있다.
두 책의 감성은 완벽하게 다르다. 신작이 아니기도 하다. 취향을 크게 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명절’ 혹은 ‘연휴’라는 단어에서 바로 떠오를 만큼 인상적이다. 긴 연휴, 그 여러 날 가운데서도 멋진 책을 함께 읽는 일이 오래 남을 좋은 기억이 되길 바라본다.
/박지현 사계절 그림책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