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로서의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피아노는 제게 슬픔과 동의어였습니다.”
아픔을 딛고 무대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은 에세이 ‘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오늘산책)를 쓴 피아니스트 이훈(54)이 말했다. 그는 미국 신시내티대 음대에서 박사과정 중이던 2012년 뇌졸중으로 갑작스레 쓰러졌다. 좌뇌의 60%를 들어내는 대수술로 생명은 구했지만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언어장애도 왔다. 한국에서 날아온 어머니 풍옥희(75)씨는 의식이 없는 아들 옆에 무릎을 꿇고 아무 말 없이 기도했다. 아들 앞에선 울지 않았다. 간병하는 동안엔 수시로 손목 인대가 늘어났다. 그녀는 이 책에 “누워있는 널 보았을 때의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늘 스스로 잘해내는 널 위해 엄마는 기도만 하면 되는 거였다”는 편지를 썼다.
한 손을 쓸 수 없는 이훈은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와 교육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내려놔야 했다. 좌절하던 그에게 스승인 전영혜 경희대 음대 명예교수가 제안했다. “훈아.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쳐보면 어떻겠니. 너는 왼손으로 나는 오른손으로 같이 모차르트 판타지를 연주하자. 세상엔 왼손으로만 칠 수 있는 곡이 1000곡이 넘는단다.” 이훈의 마음이 동했다.
“피아노가 이렇게 즐거운 적이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이훈은 녹초가 되는 재활 치료와 함께 피아노 연습에 매진했다. 양손 연주만큼 풍부한 소리를 내기 위해 운지 하나하나에 힘을 들였다. 엄지손가락으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화음을 쌓았다. 페달도 왼발로만 밟아야 해 연주 중에 몸이 틀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천천히 자신만의 주법을 빚어나갔다.
2016년 서울성모병원 로비. 이훈은 4년 만에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왼손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연주회였다. 선택한 곡은 카미유 생상스의 ‘왼손을 위한 여섯 개의 연습곡’. 오른손을 다친 피아니스트 카롤린 드 세르를 위해 친구인 생상스가 쓴 곡이다. 카롤린과 생상스를 떠올리며 건반 위에 왼손을 올렸다. 한 손으로 그려내는 명료한 선율이 관객들 사이로 퍼졌다. “무대에서 자유를 느꼈습니다. 제 공연 중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이후 그는 매년 독주회를 비롯해 여러 연주회에 오르고 있다. 올해도 공연 일정으로 그의 달력이 빼곡하다. 경기 군포 ‘지샘병원’ 장애인예술단 단장도 맡고 있다.
이훈의 롤모델은 2020년 92세의 나이로 작고한 미국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다. 화려한 경력을 쌓던 플라이셔는 30대 중반 오른손이 마비되며 왼손 연주에 매진한다. 그러다 2004년 ‘Two Hands’라는 앨범을 발표하며 마침내 양손 연주에 성공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 섰다.
뇌졸중을 겪은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포기하거나, 도전하거나. 재활의학계에 따르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실제로 저도 피아노에 매진하며 오른손 마비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어요. 돌이켜보면 ‘내 삶은 끝났다’고 절망하던 건 교만한 연민이었어요.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용기이자 겸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