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다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김혜순 시집 | 난다 | 196쪽 | 1만3000원

현대 한국 시의 최전선에 있는 시인 김혜순(70)이 3년 만에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를 펴냈다. 앞서 발표한 ‘죽음 3부작’ 이후 시인이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 생각하며 “웃음의 그릇에 담았”다는 명랑한 시들. 그는 “이 시들을 쓰면서 고통도 슬픔도 비극도 유쾌한 그릇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김혜순이 어떤 변신을 했는지 들여다보고, 시단의 뜨거운 반응과 시집 탄생의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이태경 기자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시 초심자들에게도 훅 가닿는 시집일 것이다. 그간의 시보다 쉽게 읽힌다. 유쾌한 내디딤이 즐거워 들썩이며, 때론 통통거리며, 어떨 땐 흐느적거리며 읽게 된다.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젊은 리듬에 매번 놀라면서.

‘흙흙 속에 도착한 얼굴들이 뭉개지는 모습은 참 다양해 (…) 이렇게 방마다 얼굴이 뭉개지는 이 광경// 이 광경을 묘사할 형용사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그러니 함부로 노래방 문은 여는 게 아니야’(‘흙흙 노래방’) 시체가 썩어가는 관(棺)을 노래방이라고 칭할 땐 웃음이 터진다. ‘여긴 따듯한 닭들이 많아/ 날아가서 안겨봐/ 깃털 속으로 파고들어봐/ 희미한 닭똥 냄새/ 할머니들이 가득한 병실 506호’ (‘배터리 케이지’) 요양원을 닭장에 빗댔으나, 의외로 폭신하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항 같은 화면에서 일렁이는 말미잘(Sea Anemone)을 보고 “심해의 존재에 살포시 기대고 누워” 위로받은 것에서 시집은 출발했다.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싱싱한 힘과 용기” 주는 “요지경”

시단의 반응은 뜨겁다. 시인들에게 감상을 물었다. 2000년대 미래파 대표 기수 시인 김행숙은 “싱크로나이즈드 김혜순, 하세요!”라며 “이제 김혜순은 바다와 싱크로나이즈드하고, 산맥과 하늘과 싱크로나이즈드하고, 벌판과 땅속과 싱크로나이즈드하면서 이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새 리듬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이승과 저승의, 이 몸과 저 몸의,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지는 김혜순의 세계에 빠졌다 나오면 싱싱한 힘과 용기가 생겨요.” 20대 시인들도 놀란다. 98년생 시인 유선혜는 “김혜순 시인의 리듬과 멜로디는 언제나 최첨단의 업데이트 상태로 건너간다”고 했다.

오은 시인은 “날개를 펼치듯 날렵하게, 날갯짓하듯 날름날름하게, 날개를 접듯 날카롭게, 날아갔다가 날아오는 리듬으로 날이 날이 나날이 명랑하게 거침없이 펼쳐진다”고 했다. 박연준 시인은 “어떤 경지를 훌쩍 넘어 시가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노니는 날개 같다”며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독자를 이끌어준다”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유희경 시인은 “말이 된 언어가 껑충깡충 뛰어다니면서 밀도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백지 위에서 이리저리 변신한다”며 “말이 시가 되는 세계 요지경을 본 기분”이라고 했다. 황인찬 시인은 “오랜 시적 주제였던 고통과 죽음을 짊어진 채로 자유롭게 세계를 유영하는 시인의 솜씨에 놀랐다”고 했다.

◇‘문지 시인’ 김혜순이 난다시편 1호에?

난다 출판사가 새롭게 출범한 ‘난다시편’ 1호인 점도 흥미롭다. 난다 대표 김민정 시인이 들려준 뒷이야기는 이렇다. 작년 늦가을쯤 김혜순 시인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원고를 쓰고 있어. 그런데 좀 이상해”라는 말을 들었다. 오래 붙들고 쓴 시도 아니라고 했단다.

이걸 어떻게 달라고 할까 고민하던 차, 올 초 비슷한 말을 또 들었다. 이른바 ‘문지(문학과지성사) 시인’으로 불리는 김혜순이 “문지에 줄 원고와는 다른 시”라고 하자마자 “저 무조건 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치며 원고를 받아냈다. 김민정 시인은 “김혜순 시인은 어린이의 순정을 가졌다”며 “전생이든 이승이든 마구 날 수 있는 명랑함, 새로운 언어와 보폭을 가진 놀라운 래퍼”라고 했다.

‘난다시편’은 대표 시 한 편을 영문으로 번역해 싣는다. 한국 시를 궁금해하는 해외 독자에게 일종의 ‘맛보기’를 제공하는 것. 맨 뒤에 해설을 붙이지 않는 것도 기조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받아들임’이라는 취지다. 마냥 자유롭고 싶은 어느 밤, 이 시집을 펼쳐볼 것. 바닷속 말미잘이 되어 무한한 일렁임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