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삶도 명작이 된다

이주헌 지음 | 쌤앤파커스 | 320쪽 | 2만2000원

제임스 티소, 무도회, 1880.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황금빛 드레스가 화사하고 쾌활하다. 리본과 레이스의 물결이 치마 아랫단부터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한다. 주변의 시선을 즐기는 듯 도도한 여인의 표정은 생생히 피어난 꽃들이 장식된 모자와 함께 파리의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그림 ‘무도회’(1880)를 그린 화가 제임스 티소(1836~1902)의 속마음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화가로서 성공을 안겨준 런던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낳은 바람둥이 이혼녀를 사귄다’는 비난 속에 미술계에서 ‘왕따’를 당하면서까지 사랑했던 여인과 사별했다. 죽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강신술에 빠져들 정도였고, 그녀가 죽은 뒤 파리로 떠나 다시는 런던에 돌아가지 않았다. 파리 시절 그의 그림 속 낯선 여인들이 유난히 더 밝고 유쾌한 건, 어쩌면 가눌 수 없는 슬픔의 반작용이다.

엘 그레코, 성 베드로의 눈물, 1590년경.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세밀한 해부학 지식과 기하학적 형식미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했던 다른 중세 화가의 그림과 달리, 엘 그레코(1541~1614)의 인물들은 불안정하고 흔들린다. 때론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도,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도, 천국의 열쇠를 팔목에 건 베드로도 엘 그레코의 그림 속에선 이 불안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스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배운 뒤 스페인에서 활동한 화가. 그는 중세의 반(反) 종교개혁 대의에 헌신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한 발 앞서 자신만의 근대를 살아간 진취적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밝은 빛은 내면의 빛을 방해하고, 캄캄한 공간이 사유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며 여름 한낮에도 캄캄한 방 안에서 지냈다. 400년 전 그의 그림이 마치 현대의 불안과 고독을 담은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쌤앤파커스

미술관에서 그림을 만나는 일은 낯선 이와 처음 나누는 대화를 닮았다. 화가는 그림 너머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다. 시대와 불화하는 고통, 생존을 위한 절박함, 사랑을 잃은 아픔…. 화가가 살았던 삶과 그림을 그릴 때의 마음은 어쩌면 열쇠다. 감상자가 그 열쇠를 손에 쥔다면, 화폭 너머 화가에게로 열린 문을 열고 좀 더 세심하게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의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더라도.

프랑수아 부세, 퐁파두르 부인, 1756년.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프랑수아 부셰(1703~1770)의 ‘퐁파두르 부인’(1756) 속 모델 퐁파두르 부인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후원자. 그녀가 글 쓰는 책상 옆에서 읽던 책을 손에 든 채,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림 속에 남은 것은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그녀에게 왕이 그녀의 매력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할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프란스 할스, 류트 연주자, 1623~24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프란스 할스(1580~1666)는 생기 넘치는 찰라의 미소를 포착한 초상화로 기억되는 화가. 그가 다른 화가와 차별화된 그림을 그렸던 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일찍 부유한 상인 계급이 등장하고 미술 시장이 형성되면서 화가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당대 네덜란드에선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1995) 등 30여 권의 미술 교양서를 낸 이주헌 평론가의 새 책. 내면, 행복, 사랑, 시대, 순수의 다섯 개 키워드로 엘 그레코부터 마티스까지 화가 25명의 그림과 삶을 들여다 본다. 화가의 속엣말을 들려주는 듯 친밀한 태도는 여전한 매력이다. 그는 에필로그에 “그림 앞에 서면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화가가 겪었을 분투, 고통, 좌절, 아픔을 먼저 생각한다. 미술 감상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에 공감해가는 과정”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