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을유문화사|324쪽|1만8000원
행상하는 부모는 집을 떠나 5개월째 기별이 없다. 함께 사는 할머니는 앓아누웠다. 소학교 4학년인 소년은 석 달째 수업료를 내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 소년은 광주 집을 나서 장성 친척 집까지 60리(약 23.4㎞)를 하루 종일 걷는다. 수업료를 꾸기 위해서다. 다리가 아플 때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던 인고단련(忍苦鍛鍊)이구나’ 생각한다. ‘인고단련’은 중일전쟁 때 조선총독부가 국민에게 암기시켰던 황국신민 맹세에서 ‘참고 단련해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취지로 사용되던 문구다.
1938년 치러진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에서 학무국장상을 받은 우수영 어린이의 작문 ‘수업료’ 내용이다. 급우들이 소년을 위한 모금함을 마련하는 훈훈한 에피소드로 마무리되는 이 글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아동 영화로 꼽히는 ‘수업료’(1940)의 원작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영화·연극 및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는 저자는 일제가 ‘수업료’를 높이 평가한 이유를 “그전까지 일본 교육제도에 편입되기를 반대했던 조선인들이 드디어 이 새로운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글이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8년 식민지 조선에도 일본 본토와 같은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일본 식민기구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국시 아래 일본어 교육을 강조한 제3차 교육령에 따라 조선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글짓기 대회를 연다. 이 행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개최되었고, 제1회와 제2회 우수작들은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저자는 이 문집에 드러난 어린이들의 내면세계를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수상작들이 조선총독부의 ‘모범적인 어린이상’을 대변한다는 가정 아래 어린이들의 글을 읽는다. 근대 일본 교육 시스템의 핵심은 수신(修身) 교과서로, 국가는 이를 통해 ‘이상적인 아동상’을 형성하려 했다. 1·2회 글짓기 대회가 개최됐을 즈음 일본 어린이들은 일본 본토 국가검정 수신 교과서를 사용했고, 조선 어린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따로 펴낸 수신 교과서를 사용했다. 일본 어린이용 교과서엔 주체성을 기르라는 메시지가 강조된 반면, 조선 어린이용 교과서는 상하 관계를 중시하며 ‘분수를 알라’는 내용이 담겼다.
어린이들의 글에 나타난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하다. 일본 어린이들의 글에서 ‘아버지’는 대개 상업 종사자거나 군인이다. 군인 아버지는 멋있고 헌신적인 데 반해 상인 아버지는 다소 부끄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조선인 아버지들의 존재는 훨씬 미약하다. 병들어 걱정해야 하는 존재이거나, 집을 떠나 아예 소식이 없다. 저자는 이를 조선의 전통적 가부장제가 제국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나라를 빼앗긴 데 이어 성씨마저 빼앗기게 될 조선인 아버지들은 절대적인 부성을 박탈당하고 천황제 가족주의 속 대동아공영권에 봉사하는 중간자적 존재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없었던 조선인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가정 내 위신을 유지해 주는 재래의 생활 관습에 기댄 채 그저 죽은 듯 연명할 뿐이었다.”
양국 어린이의 경제적 차이도 극명하게 불거진다. 일본 어린이가 프랑스 인형을 가지고 놀며 개와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기를 때, 조선 어린이는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쌀을 씻고, 돼지를 팔러 장에 간다. 제2회 총독상 글짓기 대회에서는 3학년 시마이 레이코가 쓴 ‘너무 좋은 오모니’가 둘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오모니(オモニ)’는 ‘어머니’의 일본식 발음으로, 당시 재조 일본인들이 나이 많은 조선인 가정부를 부르던 말이었다. 작문 속 ‘오모니’는 필자를 ‘오죠상(아가씨)’이라 부르며, 필자에게 글을 배우는 열등한 존재로 그려진다.
전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를 넘어 양국 어린이 모두에게 가혹하다. 입대하는 오빠를 배웅한 심경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던 2학년 오오츠 타에코와, 지원병이 된 숙부를 떠나보내며 “숙부가 기필코 용감하고 강한 병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쓴 3학년 김금섭의 마음은 결국 한 갈래다.
가장 천진한 눈으로 가장 잔혹한 시대를 바라본 기록. 그 대비가 슬픔과 씁쓸함을 안긴다. 2차 대전 당시 재일 조선인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권정생 소설 ‘슬픈 나막신’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