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독일혁명이 한창인 시기, 뮌헨 중심부 광장 칼스플라츠(Karlsplatz)에 몰려든 사람들. 막스 베버의 1월 뮌헨대 강연은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19년 1월, 독일은 패전과 혁명의 삼각 파도를 만나 침몰하고 있었다. 카이저의 퇴위로 떠밀리듯 국가 권력을 넘겨받은 신생 공화국은 극좌 세력의 맹동(盲動)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혁명의 전위는 항상 피 끓는 젊음, 더구나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강연한 뮌헨대학은 독일 혁명의 진앙이었다. 불후의 고전이 탄생한 배경에는 질풍노도가 있었다. 정치사상사 2000년 동안 늘 그래 왔듯이.

베버의 강연은 국가를 “주어진 영토 안에서 폭력의 수단을 정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결사체”라고 정의하며 담담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차분한 겉보기와 달리 아직도 헌법이나 정치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유명한 정의에는 뾰족한 속내가 숨어 있었다. 국가가 폭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집단에 불과하고 본질에 있어 자기들 ‘나와바리’를 지키려고 싸우는 조폭과 다를 바 없다는 언설은 막 끝난 전쟁에서 1000만 가까운 젊음을 사지로 몰아넣은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에 대한 통절한 고발이었다. 국가가 인륜의 완성이자 역사의 종착점, 심지어 신의 대리자라는 주장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 일종의 신성 모독이고 우상 파괴였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살육극을 뒤따라온 패전과 혁명이 우상 숭배에 빠진 지도자의 탓만은 아니었다. 책임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지몽매한 지도자를 맹종(盲從)했던 관료들에게도 있었다. 무릇 관료는 주어진 목표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수단합리적(zweckrational)’ 판단에 최적화되어 있다. 전쟁과도 같은 고도의 정치적 상황에 필요한 ‘가치 또는 목적합리적(wertrational)’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유전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기능적 존재인 것이다. 1차 대전은 우매한 지도자의 혼미한 영혼이 아예 영혼 없는 관료들을 만나 빚은 참극이었다.

베버가 보기에 문제는 결국 정치였고 그중에도 지도자의 자질이었다. ‘소명으로 정치’를 해야 할 지도자는 정치하기를 거부하고, 정치하지 말아야 할 기회주의자들이 ‘생업으로 정치’를 하다 맞은 결과가 패전이고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신념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강조한 정치 지도자의 자격은 무엇이었을까.

그래픽=양진경

첫째는 열정과 신념. 자유도 좋고 정의도 좋다. 영구 평화건 부국강병이건 상관없다. 열정적인 신념이 없는 자, 정치를 하면 안 된다. 하다못해 실용도 그렇다. 중용의 철학에 기대지 않은 원칙 없는 실용주의가 얼마나 부박(浮薄)할 수 있는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번에 돌아온 실사구시는 무엇이 다를지, 어떤 차가운 열정, 조용한 신념을 보여줄지 두고 볼 일이다.

둘째는 지성과 관용. 아는 만큼 보이고 모르니까 맹신(盲信)한다. 자기 확신의 강도는 지성의 예각(銳角)에 반비례한다. 자신의 신념이 절대선이나 진실의 전부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부단한 지적 단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밝은 눈과 깊은 속은 다른 의견과 입장에 대한 경청과 존중으로 이어진다. 관용은 지성에서 나온다.

셋째는 용기와 타협. 통약(通約) 불가능한 가치들이 끝없이 쟁투하는 ‘죽은 신의 사회’에서 정치는 잠정적 휴전(modus vivendi)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휴전을 위한 타협은 선명한 입장 차를 전제한다. 진정성 없는 가치관들 사이의 타협은 지켜지지 않을 야합에 불과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조화를 경계하면서도 대의를 위해 정치에 투신하는 용기다. 서로 다른 입장은 지난한 정치의 과정을 거치며 더욱 선명해지고 휴전의 명분은 그 싸움의 끝에 가서야 만들어진다. 진정한 타협은 용기에서 비롯된다.

넷째는 목측 능력(Augenmaβ). ‘목측(目測)’의 사전적 정의는 “눈으로 보아 어림잡아 헤아림”(국립국어원)이다. 흔히 ‘눈대중’이라고도 부르는 그 ‘헤아림’에서 베버는 현실을 냉철한 객관으로 인식하는 데 필요한 판단의 신중함과 균형 감각을 본다. 그런 사려 깊은 안목을 키우기 위해 이념적 청맹과니의 안경을 벗어야 함은 물론이다. 더 중요하게는 공명심과 허영심, 자아도취나 자격지심, 필경 그 뒤를 따라오는 자기기만 그리고 주관적 희망 사고를 경계하는 데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객관적 목측 능력은 철저한 자기 객관화에서 출발한다.

마지막으로 책임감. 현실은 항상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의도치 않은 결과로 점철되어 왔다. 국가가 독점한 폭력 수단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정치 투쟁의 현실은 더욱 그렇다. 선한 의도가 구현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현실적인 비용, 예상치 못한 피해가 부수되기 마련이다. 소명의 정치가 지는 책임에는 끝이 없다.

심지어 ‘정전(just war)’에서 승리해도 정의를 위해 뿌린 피로 ‘더러워진 손(dirty hand)’은 남는다. 온 세상이 칭송해도 피가 씻겨질 수 없음을 그 손의 주인만은 안다. 마지막까지 안고 갈 회한과 죄의식은 지도자의 책임이 지닌 영겁의 무게를 증거한다. 정치는 허업(虛業)이 아니라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는 싸움에 영혼의 전부를 갈아 넣어야 하는 비극이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행간을 통해 베버가 독일 국민에게 고하고자 했던 바는 명료하다. 패전 세력에게는 철저한 책임감과 완전한 환골탈태, 혁명 세력에게는 진중한 자제와 성숙한 심모원려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연의 끝에 가서 깨어 있는 인내심을 모두에게 당부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두움, 얼음같이 차가운 밤을 견디고, 정치라는 두꺼운 널빤지에 서서히 또 끈질기게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자,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을 자,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여러분 중 그런 사람만이 정치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불후의 고전은 시공을 넘어 말을 걸어온다. 지금 한국에서 거기에 귀 기울이고 대화해야 하는 건 특히 이번에 총파산을 선고받은 보수 정치다. 그 대화로 지새워야 할 보수의 밤은 깊고 길다.

그래픽=양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