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케일럽 에버렛 지음|노승영 옮김|위즈덤하우스|376쪽|2만2000원
이누이트어에는 ‘눈[雪]’에 해당하는 단어가 적어도 네 개 있다. 카나(qana·내리는 눈), 피크시르포크(piqsirpoq·떠다니는 눈), 키무크수크(qimuqsuq·이미 떠 있는 눈), 아푸트(aput·땅 위에 있는 눈). 이에 반해 호주 특정 지역 원주민에겐 눈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예 없다.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저자는 “언어가 다채로운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물리적·사회적 환경이 다채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누이트어를 쓰는 그린란드인들에게 ‘눈’에 해당하는 낱말이 여러 가지인 것은 여러 종류의 눈을 맞닥뜨리기 때문이고, 눈을 중심으로 행동과 계획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 눈 만날 일 없는 호주 원주민에겐, 눈을 가리키는 다양한 낱말은 필요하지 않다.
유년 시절 선교사이자 언어학자인 부모님을 따라 아마존에서 원주민과 함께 생활한 저자는 언어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언어·인류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시제·공간·색상과 냄새·기본 어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가 인간의 삶에, 삶이 언어에 미친 영향을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능선과 골짜기가 부드럽게 이어진 라오스에선 ‘산’과 ‘언덕’을 따로 지칭하는 말이 없고 모두 ‘푸’(phuu)라는 점 등, 언어와 관계된 재밌는 사실들이 많이 담긴 책이다.
‘초록불’을 보고 자주 ‘파란불’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비밀도 풀린다. 저자는 “거의 모든 언어에서 파란색을 가리키는 용어보다 빨간색을 가리키는 용어가 더 발달했다”고 말한다. 빨간색은 모든 환경과 인구 집단에 보편적인데, 인간과 사냥감 둘 다 피가 붉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파란색 사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덜 나타난다. 파란 사물보다 빨간 사물에 대해 더 자주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빨간색 용어의 발달을 낳고, 파란색 용어에 서툴게 한다. 실제 파푸아뉴기니 소수 민족이 사용하는 베린모어에선 파란색과 초록색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어와의 공통점 혹은 보편적 특징을 찾는 데 집중했던 기존 서구 중심 언어학 연구에서 벗어나, 아마존·동남아시아·태평양·오세아니아 등 7000개의 언어에서 찾아낸 다채로운 사례를 활용했단 점이 책의 미덕이다. 종종 한국어를 발견하는 반가움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