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칠십잡억

박한제 지음|지식산업사|698쪽|3만8000원

한여름 다 보내고 늦게 여문 이른바 ‘늦박’은 크기는 크지만 그대로 바가지를 만들면 쭈그러들어 못 쓴다. 오히려 이를 진흙 바닥에 묻었다가 속을 썩게 두고, 이를 긁어 바가지를 만들어야 튼튼한 것이 된다. 이 ‘늦박과 썩은 속’을 보며 저자는 생각한다. 인생의 성패 요건엔 확정된 답이 없다. 늦음이 반드시 손해만 주는 것도 아니다.

작은 지식과 잔재주라도 일단 뽐내고 보는 요즘 에세이 시장에서, 평생 우직하게 한 학문에 매진한 노학자는 70여 년간 자신이 겪고 느낀 바를 글로 펴내며 제목을 그저 ‘칠십잡억(七十雜憶)’이라 붙인다. “칠십이 돼서까지 들었던 여러 생각들”이란 뜻이라고 했다.

제목은 소박하지만 글은 웅숭깊다. ‘에세이’란 이름보단 ‘수필’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글들이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부터, 때로 가슴 먹먹한 슬픔과 좌절의 순간까지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루 담았다.

‘그 겨울의 찻집’을 들으며 옛사랑을 회고하고, 인순이의 ‘거위의 꿈’ 가사를 보며 노년의 나이에도 꿈을 잃지 않기로 다짐한다. 42년을 보낸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떠날 땐 ‘교수에겐 정년이 있지만 학자에겐 정년이 없다’고 쓴다. 오랜 진흙의 시간을 견뎌 낸 늦박처럼, 연륜에서 축적된 통찰과 삶의 혜안이 곳곳에서 단단하게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