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해장국집 건물 3층. 가파른 계단 끝 빨간 대문을 열자 바닥의 카펫, 커다란 원형 탁자와 의자까지 온통 붉은색인 연극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책장과 책장 사이엔 막이 열리기 전 무대처럼 붉은 커튼을 쳐 놓았다. 서울 대학로(이화동)의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 풍경이다.
2023년 연희동에 문을 열었다가 최근 대학로로 확장 이전한 이 서점은 배우 부부 박세인(34)·권주영(36)씨가 운영한다. 아내 세인씨는 고교 때부터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남편 주영씨는 군 복무 중 포상 휴가가 탐나 군 뮤지컬, 단편영화 등에 출연한 일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단편영화 제작 때 메가폰을 잡은 후임이 “마스크가 독특해 찍어보고 싶다”며 주영씨를 주연으로 밀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12년 같은 영화에 출연하며 만나 2022년 결혼했다. 희곡 전문 서점을 차린 건 주영씨 아이디어. “연기 학원 강사를 했는데 희곡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아 알음알음으로 전자 파일을 내려받곤 했어요. ‘희곡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생각하다가 관객의 마음으로 희곡을 읽고 싶어 서점을 열었습니다.”
인스크립트가 소장 중인 책은 대략 3000권. 그중 희곡 비율이 70~80%다. 나머지 책은 연극·영화 관련서. ‘희곡으로 장사가 될까’ 싶지만 매달 300~400권가량 팔린다. 박세인씨는 “연극 종사자, 공연 팬, 연기 전공생, 희곡이 낯설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분들이 주로 찾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희곡은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가 레바논 내전의 상처를 주제로 쓴 ‘화염’(지만지드라마). “영화 ‘그을린 사랑’의 원작이기도 해요. 희곡 자체가 흡인력 있고 서사가 강렬해 읽은 분들이 다 좋아하셨어요. 한 달에 10~20권씩 꼬박꼬박 팔립니다.”(박세인) 이 밖에 박지선 희곡 ‘은의 혀’(걷는사람), 김은성 희곡 ‘빵야’(알마) 등이 꾸준히 나간다. 권주영씨는 “한국 현대 희곡을 많이 추천한다. 곁에서 벌어지는 일을 환기하는 것이 희곡의 장점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 희곡이 우리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좋다”고 했다.
배우들이 대본 리딩하듯 희곡을 소리 내 읽으며 연기하는 6~8명 규모 ‘낭독서 모임’은 부부가 특히 신경 써 운영하는 프로그램. 혼자 읽기 쉽지 않은 장르인 희곡을 함께 읽고, 연극이 일상에 스며들면 좋겠다는 취지로 기획했는데 성별·연령을 불문하고 인기가 높다. “‘파란 나라’라는 희곡을 읽은 적이 있어요. 욕설과 날 선 말이 많은 작품이라 참가자들이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다들 너무나 즐거워하셨어요. 모임이 끝나고 나서 60대 여성 회원 한 분이 ‘너무 속 시원하고 좋았다. 이런 게 나를 살게 해주는 것 같다’ 하시더라고요.”(권주영)
부부는 종종 낭독극을 기획해 무대에 올린다. 붉은 커튼, 조립식 원탁 등이 모두 공연을 염두에 두고 무대 세트처럼 가변성 있게 고안한 장치다. “이 공간을 꾸려서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게 연극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연극은 공간 베이스 예술이라 공간을 만들고 허무는 게 일인데, 서점 운영과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박세인)
책뿐 아니라 음료도 판다. 조리 고등학교 출신인 권주영씨가 만드는 토마토 에이드가 특히 반응이 좋다. “작년 서점에서 ‘토마토 에이드’라는 1인극을 했어요. 어릴 때 엄마가 설탕 묻힌 토마토를 바가지에 담아 여동생과 제게 주면 달콤한 국물은 항상 제가 다 마셨어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연극으로 만들었어요.”(권주영)
서점 운영의 모토는 ‘사랑받은 만큼 지속한다’. 부부는 “책 팔아 돈 벌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폐업을 고민한 적도 있지만, 손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꾸준히 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희곡 전문 서점이라는 게 존재하기만 해도 연극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겐 힘이 되잖아요. 저희가 잘 존재하고 계속해서 소개되면 연극과 희곡이 사랑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인스크립트의 PICK!]
●세인이 가장 좋아하는 희곡=신혜연의 ‘그리고 도둑들’. ‘악어시, 체액, 그리고 도둑들’(1도씨와온도들)이라는 희곡집에 실렸다. 검은 손을 가진 여자가 다른 손을 갖고 싶어서 도둑질하는 이야기인데, 영화보다는 무대에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주영이 가장 좋아하는 희곡=‘래러미 프로젝트‘(열화당). 1998년 미국 와이오밍주 래러미에서 발생한 동성애자 살인 사건을 소재로 했다. 극작가와 극단이 래러미를 수차례 방문, 주민들을 인터뷰해 만든 다큐멘터리다.
●희곡 입문자에게 추천하고픈 책=프랑스 작가 레오노르 콩피노의 ‘벨기에 물고기’(지만지드라마). 자신을 물고기라 생각하는 10대 소녀와 은둔자인 40대 남성의 대화로 이루어진 2인극인데, 얼핏 기괴한 것 같은 그 대화가 결국 독자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