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엘리스 버넌 펄스틴 지음|라라 콜 개스팅어 그림|김정은 옮김|열린책들|360쪽|2만5000원

밤의 정원, 훅 끼쳐오는 향기에 뒤돌아보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하얀 꽃들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흰 꽃 앞에서 벌새 같은 것이 정지 비행을 한다. 정확히는 벌새와 크기가 비슷한 야행성 곤충 ‘박각시’라는 나방이다. 박각시는 꽃향기를 따라왔고, 기다란 입으로 꽃꿀을 빨아먹는다. 털로 뒤덮인 몸에는 꽃가루가 달라붙고, 이 꽃가루는 다음 꽃에서 꿀을 빨 때 그 꽃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조향사가 재료를 선택하고 완벽한 조합의 향수를 창조하기 위한 비율을 결정하듯 흰 꽃은 독특한 ‘향기 암호(odor code)’를 만들고 밤하늘로 방출해 날개 달린 꽃가루 매개 동물을 유인한다. 흰 꽃은 거의 항상 밤에 피며, 대표적인 식물로는 치자나무, 목련, 비단향꽃무, 꽃담배, 브루그만시아, 야래향, 월하향, 포인츠재스민이 있다.

미국 야생동물 생물학자로, 50세가 넘어 향기에 매료돼 조향사로 일하고 있는 저자 엘리스 버넌 펄스틴(69)은 꽃과 나무의 향기에서 시작해 향신료와 허브, 향수까지 향(香)의 세계를 우아한 문체로 유영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향기를 추출해 가공하고 이용한 역사를 주제로 한 인문서지만, 과학자답게 향기의 화학 성분 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흐드러진 벚꽃 속에서 한 여성이 향기에 취해 있다. 인간은 식물의 향기를 즐기지만 저자는 “식물 입장에서 향기 분자를 만드는 건 자신을 위해서일 뿐이다. 식물은 흩날리는 향기의 설계자다”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밤에 피는 꽃은 흰색, 담황색, 연한 녹색과 같은 밝은 색을 띠며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난다. 꽃잎은 짙은 색 잎과 대비돼 더 잘 보이도록 갈라진 형태다. 꽃잎 뒤쪽은 길쭉한 대롱 모양이라 나방의 기다란 입에 딱 맞는다. 꽃꿀은 묽다. 그래서 나방은 처음 찾은 꽃에서 배를 채우지 못하고 여러 꽃을 연달아 찾게 된다. 담배꽃 역시 달콤하고 풍부한 ‘흰 꽃(white flower)’ 향기를 갖고 있다. 꽃은 향기로 나방을 끌어들이고, 뿌리에서 생산돼 잎과 꽃꿀로 분배된 니코틴은 ‘생물학적 살충제’로 애벌레나 씹는 곤충으로부터 잎을 보호한다.

성경의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 몰약을 바친다. 황금은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영적 특별함을 상징하며, 몰약은 죽음을 상징한다. 유향나무는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척박한 토양에 서식한다. 유향의 원료는 나무줄기에서 물방울 형태 덩어리로 배출되는 수지(樹脂·나뭇진)다. 유향나무 수지는 열을 받았을 때 향이 잘 방출되기 때문에 ‘훈향(燻香·incense)’의 형태로 이용됐다.

‘향수(perfume)’라는 단어의 기원은 ‘연기를 통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per fumum’다. “인간은 처음 훈향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사용했을 때부터 그것을 저 높은 곳에 살고 있을 신들에게 보내는 기도나 대화로 인식했을 것이다. 훈향은 메시지를 위로 전달하고, 성스러운 공간을 정화하고, 사람들이 명상과 제례 의식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유향의 향은 감귤류나 꽃 느낌이고, 몰약은 더 씁쓸한 약 냄새 같지만 신비스러운 농후함이 있다. 인간의 유향 사랑은 아주 오래전 시작됐다. 아라비아 반도의 유향과 몰약은 역사시대 초기부터 외부 세계로 진출하면서 ‘인센스 로드’의 토대를 닦았다. 기원전 1500~1200년에 낙타의 가축화가 이루어지면서 훈향의 교역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기원전 1000년이 되자 유향은 바빌론, 이집트, 로마, 그리스, 중국까지 알려지고 귀하게 여겨졌다. 인센스 로드를 통한 유향의 이동은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 정점에 달했고, 유향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교역품 중 하나였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인 ‘신드바드의 모험’ 주인공은 아라비아 반도 주위를 항해하며 유향을 거래하던 상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꽃을 이용한 향수 제조법도 흥미롭다. 장미는 꽃 전체를 증류해 향수로 만드는데, 다마스크 장미라는 종을 가장 많이 쓴다. 재스민, 월하향, 히아신스 등 열을 견딜 수 없거나 수확 후에도 향을 발산하는 귀한 꽃은 냉침법(冷浸法)으로 향기를 추출한다. 지방이 냄새를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반고체 상태 기름에 향기를 입혀 굳힌 후, 알코올 세척을 통해 향기를 뽑아내는 것이다. 은방울꽃은 향기롭지만 향수 용도로 추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부분에 심장 수축력을 증가시키는 강심배당체와 독이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파는 은방울꽃 향수는 인공적인 화합물이다.

꽃피는 봄날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책. 번역도 유려하다. 향수를 묘사할 때 조향사들의 관용어구처럼 ‘파우더리한 아이리스 노트’ 등 이른바 ‘보그체’로 번역하고픈 유혹을 꾹 누르고 ‘분가루 같은 제비꽃 향기’ 같은 우리말로 옮기느라 골머리 앓았다는 역자 후기도 재미있다. 원제 S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