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홋카이도 제2 도시 아사히카와에 와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내리던 눈이 잠시 그치고 반짝 햇빛이 나던 오후, 1898년 일본 정부가 외국에서 여러 수종을 들여와 생육 시험을 하려 조성한 견본림을 찾았습니다. 이 숲 어귀에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1922~1999) 기념 문학관이 있습니다.
아사히카와는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이자 대표작 ‘빙점(冰點)’의 배경. 잡화점을 하던 미우라는 ‘빙점’이 1964년 아사히신문의 1000만엔 현상 공모에 최우수작으로 당선되면서 일약 스타 작가가 됩니다.
“바람 한 점 없다. 동쪽 하늘에 높다랗게 떠 있는, 햇빛에 반짝이는 뭉게구름은 한 폭의 그림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지면엔 스트로부스소나무 숲의 짤막한 그림자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빙점’의 도입부입니다. 견본림 옆에 사는 병원장 게이조오의 아내가 젊은 의사와 밀회하는 동안, 숲에서 놀던 세 살배기 딸 루리코가 유괴돼 살해당합니다. 복수심에 불탄 게이조오는 살인범의 딸 요코를 입양해 출신을 숨긴 채 아내가 키우도록 합니다.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 스트로부스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걷자 제방이 나오고, 그 너머 독일가문비나무 숲을 빠져나오니 강이 흐르고 있더군요. 이 강변에서 루리코가 살해당하고, 출생의 비밀을 안 요코는 죄책감에 자살을 기도합니다.
스토리는 자극적이지만 ‘빙점’은 기독교 색채가 짙은 작품입니다. ‘너의 적(敵)을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요코를 사랑하려 애쓰면서도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게이조오의 마음속 갈등이 치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문학관 천장에 ‘용서와 사랑’이라 적힌 흰 천이 걸려 있었어요. 세상은 편 가르기와 증오로 넘쳐나지만, ‘빙점’의 세계에서만은 용서의 가치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로가 되었습니다. 곽아람 Books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