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보라
박지일 시집 | 196쪽 | 민음사 | 1만2000원
박지일의 두 번째 시집 ‘물보라’는 물보라에 의한, 물보라를 통한, 물보라를 위한 시적 사건의 급진적 출현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단순히 스물한 편의 ‘물보라’ 연작이 있고, 도처의 모든 시에서 물보라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지일에게 물보라는 보다 전면적인 것, 이른바 시 쓰기의 기원이자 목적이며, 시가 탄생하는 언어의 영도(零度) 같은 것이다. “너는 쓴다./ 물보라와 물보라 사이에서.” 그리고 이렇게 적는다. “물보라; 너는 쓴다, 다 물보라였다고.”
도대체 물보라가 무엇인가. 하지만 물보라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시적 메시지에 관해 묻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박지일의 집요하면서도 파격적인 언어적 연출이 보여주는 것은 익명적 언어의 반복적 중얼거림, 찬란하게 부서져 가는 말의 파편들,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의미의 흔적들이다. “순서가 없는 물보라./ 합쳐질 수도, 나눠질 수도 없는 물보라”는 오직 “물보라만 반복하는 물보라”를 지시할 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박지일의 시적 실험으로부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이상(理想)주의적 흔적과 이상(李箱)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오마주가 엿보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시학의 근본주의자이자 미학적 스타일리스트로서 박지일은 의미 너머의 세계를, 말이 일종의 독자적 사물처럼 자동사적 야생성을 구가하는 눈부시고도 매혹적인 시적 풍경을 펼쳐낸다. 시인은 끊임없이 읊조린다. 다만 물보라를 보라. ‘물보라’는 의미의 “자기 함락” 속에서 태동하는 시적 언어의 급진적 자기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