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초상
하영휘 지음|궁리|344쪽|2만5000원
‘양식이 떨어졌다. 볏섬 빌리는 곳에 편지를 쓸 때 인사 차릴 것이 없어서는 안 되니, 부채를 속히 보내라.’ ‘접때 가마꾼 삯 중 아직 덜 준 것이 많다고 했구나. 양반이 신용을 잃으면 안 되는데, 내게 석 냥밖에 없어 보낸다.’
양식을 걱정하고 가마꾼 삯을 못 줘 쪼들리는 속사정은 선비가 드러낼 수 없는 치부였다. 체면과 예절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자 조병덕(1800~1870)이 둘째 아들 조장희에게 보낸 편지 1700통엔 이런 내용이 수두룩하다.
노론 학통을 이은 유학자 조병덕은 현 충남 보령의 삼계리에서 일생을 보냈다. 조부, 부친, 본인까지 3대가 급제하지 못한 ‘몰락 양반’이었다. 신분제가 흔들리고 민란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다. 밖으로는 서양 열강이 밀어닥치고 천주교가 확산됐다. 조병덕은 이런 변화를 ‘변괴’로 보고 편지에 담았다.
16년 전 이 책을 낸 고문서 연구자 하영휘는 이번 개정판에서 ‘가서’(家書)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가서’는 ‘가족끼리 주고받은 편지’란 뜻이다. 예의, 형식에 얽매인 그 밖의 편지와 달리 솔직하고 내밀하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일상사의 보고(寶庫)’라 할 만한 옛 편지들이 이대로 사장(死藏)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