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환상통
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312쪽|1만2000원
Phantom Pain Wings
By Kim Hyesoon·Translated by Don Mee Choi |208쪽|$18.95
김혜순(69) 시인이 열세 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시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 문인이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본래 영어로 쓰인 시집이 아닌, 번역 시집이 이 상을 받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1975년부터 매년 미국에서 영어로 쓰인 최고의 책을 선정해 시·소설·논픽션·전기·번역서 등 부문별로 상을 준다. 비평가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김 시인은 “전혀 수상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아시아 여자에게 상을 준 것이 놀랍고 기쁘다. 훌륭한 번역으로 오래 함께해온 최돈미씨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1979년 문학과지성사 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NYT ‘올해의 시집’에 이은 수상, 美 평단 호평
“이렇게 큰 상을 받아 가지고 얼마나 좋아요? 시상식에 같이 참석할까요? ”(정명교 문학평론가)
“아니, 이미 어젯밤에 시상식을 했다는데… 출판사가 대신.”(김혜순 시인)
“옛날에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제롬 랭동 출판사 사장이 대신 갔어요. 그것도 아주 영광이라고.”(정)
김혜순 시인은 취재진과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지만, 가까운 문인들의 축하 전화는 흔쾌히 받았다. 22일 오후 둘의 통화를 옆에서 엿들은 기자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달뜬 기운을 느꼈다.
이번 시집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최돈미 시인이 영역했다. 최 시인은 김 시인의 전작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죽음의 자서전’ 등도 영어로 옮겼다. 문인들은 “소설가 한강에게 데버러 스미스가 있다면, 김 시인에게는 최돈미 시인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둘은 2018년 ‘죽음의 자서전’으로 함께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 부문상을 받았다.
시집은 지난해 5월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미국 평단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말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날개 환상통’을 포함시켰다. NYT는 “유령, 그로테스크함, 미래가 없는 다양한 공포가 읽힌다”면서 시집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새의 시집’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해 “이 시집은 책이 아니라, 새하는 순서(I-do bird sequence)”라고 썼다. 시집을 아우르는 ‘새’의 이미지에 압도됐다는 평가다.
◇재앙까지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여성성
김 시인의 시는 고통을 집어삼켜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여성적 힘을 지닌다.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날개 환상통’), ‘새가 나를 오린다/시간이 나를 오리듯//오려낸 자리로/벌어진 입이 들어온다//내가 그 입 밖으로 나갔다가/기형아로 돌아온다’(‘고잉 고잉 곤’).
정명교 문학평론가는 “그는 1980년대 이후 완전히 새로운 여성 시의 선두에 선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로서의 여성성을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것. “인고(忍苦)의 여성이 아닌, 수많은 사건과 타자, 심지어 재앙까지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재반죽해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는 그런 여성성을 만들어냈다.” 정 평론가는 “세계의 그 어떤 여성주의도 이런 시도는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문학과지성사 대표인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문학 시장에서 주류라고 할 수 없는 시·아시아·여성 등 주변부의 것들이 영어권 문학에서 호명된다는 것은 대단히 큰 문학적·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한국 여성의 몸과 죽음에 대한 감각에서 출발한 김 시인의 시 세계가 전 세계인의 동시대적 관심사와 절묘하게 연결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