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산책하고 내려오는데 소식을 들었어요. 얼떨떨했죠. 그래도 딸이 ‘우리 엄마 맨날 실수투성이 아줌마인 줄만 알았는데 대단하네’ 하며 축하해주더군요. 동료 작가들도 모두 내 일처럼 기뻐하며 응원해주셨고요.”

올해 세계 최고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금이 작가가 서울 중구 자택 거실 탁자 위에 아끼는 책들을 펼쳐 보였다. 그는 "제가 이야기를 만드는 힘은 세상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셨던 할머니가 물려주신 것 같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20일 서울 중구의 자택에서 만난 이금이(62) 작가는 “고생해서 추천해주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보답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의 올해 글 작가 부문 최종 후보 6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고, 내달 8일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발표를 앞두고 있다. 한국은 2022년 이수지 작가가 그림 작가 부문에서 안데르센상을 받은 바 있지만, 텍스트의 보편적 공감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글 작가 부문 최종 후보는 이금이 작가가 처음이다.

아동문학 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는 “일본은 아동문학 역사가 깊고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 받은 적이 있지만, 이금이 작가는 오직 자기 창작 세계의 힘으로 심사위원들을 설득해냈다. 후보가 된 것만으로 기적 같은 일”이라며 “다양성, 포용, 소수자에 대한 관심, 디아스포라 등 지금 세계 아동청소년문학의 가장 강력한 주제와 결이 맞다”고 했다.

그래픽=정인성

본인은 겸손하지만, 1984년 등단해 올해로 작가 생활 40년이 된 그는 이미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의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다. 인터뷰나 강연 자리에 나가면 늘 ‘작가님 책을 읽으며 컸다’는 인사가 이어질 만큼 그의 책은 오래 사랑받았다. 1999년 펴낸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교과서에 실리고 필독서로 꼽히며 70만부가 팔렸다. 새엄마를 통해 가족이 회복되는 이야기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은 3부작으로 완성했는데, 올해 출간 30주년을 맞아 이 책의 팬들을 위해 4권째 새로운 이야기를 펴냈다.

이금이 작가의 가장 놀라운 점은 새로운 발상과 접근법으로 꺼려지던 소재와 주제들까지 폭넓게 접근하며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는 점이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은 동화책에서 늘 악역이던 새엄마를 통해 가족이 회복되는 이야기.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에선 이름이 같은 성폭력 피해 소녀인 두 명의 유진이 서로의 버팀목 같은 친구가 된다.

해외 번역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 세 여성의 인생 유전에 대한 이야기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호주, 일본에서 출간됐다. 일제강점기 극과 극으로 신분이 달랐던 두 여성의 이야기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는 미국, 영국, 일본에서 책으로 나왔고, ‘유진과 유진’은 일본·베트남·대만에서 출간됐다. 작가는 “애초에 쓸 때는 외국어로 번역돼 읽힐 거라는 생각 전혀 안 했는데, 한국의 특수한 이야기에 세계의 독자가 보편적 반응을 하는 데 늘 감동받는다. 내 책의 독자들이 이렇게 넓게 펼쳐질 수 있구나 놀란다”고 했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의 근원은 “우리 할머니”라고 말한다. “한글을 모르는 걸 한탄하시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신 이야기꾼이셨죠. 덕분에 놀이처럼 이야기를 만들며 자랐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는 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숨 쉬듯이 이야기가 마음으로 들어오고, 일상 속 자극과 경험을 통해 풍부해지고 단단해진다”고도 했다. “혹부리영감 노래주머니처럼 이야기 주머니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빵 반죽을 만들어 놓으면 저마다 제각각 부풀어 오르듯이. 마음속에서 몇 개의 이야기가 제 일상과 섞이면서 만들어져 가요. 그러다 마치 이미 읽은 책이나 본 영화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때쯤 되면 그제서야 꺼내 문장으로 옮기기 시작하죠.”

이금이 작가의 책들은 드라마와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등은 공중파 방송에서 단막극으로 방송됐고, ‘유진과 유진’은 대학로 소극장 창작 뮤지컬로,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서울시뮤지컬단을 통해 대극장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공연은 볼 때마다 책 속 인물들이 무대 위로 가서 말하는 것 같아 애틋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지금까지 펴낸 총 51권의 책 중엔 청소년 소설이 15권, 나머지는 대부분 동화책이다. 작가는 자신의 책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밤티출판사를 세워 이전에 썼던 책들을 지속적으로 개정판으로 펴내고 있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행보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고, 과거엔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잖아요. 혐오나 차별, 배제의 표현들은 고치려고 노력해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니까 그냥 이해하고 읽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시상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작가는 오히려 덤덤하다. 그는 “사할린 이주 동포들 이야기를 2월부터 쓰려고 했는데, 덜컥 안데르센상 후보가 되면서 시작을 못 했다. 볼로냐에 다녀오면 바로 쓰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제 안에서 익어가며 어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제때 다 세상에 꺼내주고 싶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을 기리기 위해 1956년부터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주관해 격년으로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 ‘아동문학 노벨상’으로 불린다. 올해엔 34국 위원회가 자국 작가 총 60명을 추천했다. 2022년 이수지 작가의 그림작가 부문 수상으로 한국은 이 상을 받은 작가를 배출한 세계 28번째 나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