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소설 | 래빗홀 | 268쪽 | 1만6800원

누가 내 시간을 훔쳐 가길 바라나요? 그렇다면 이 책을 읽으세요. 정보라의 연작 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만난 마음이 이렇다. 이 책은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여섯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들기 직전, 책의 맨 앞에 놓인 단편 ‘문어’를 살짝 열어봤다가 그만 ‘고래’까지 내달려버리고 말았다. 잠도 휴대폰도 잊었다.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럽다. 농성 천막에 거대한 문어가 나타났다는데,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 문어는 이미 생물이 아닌 상태다. 라면 냄비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라고 묻는 존재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생물 문어 이렇게 큰 거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라고 말하는 ‘위원장님’과, 그를 취조하는 듯한 ‘검은 덩어리’, 그리고 이 기묘한 상황에 연루된 대학 시간강사 ‘나’를 따라간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니 다크 코미디가 이어지는데 누구도 웃기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서 더 강렬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대게 앞에서 ‘나’는 ‘요리를 해버리면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장이 가볍게 휘발되지 않는 것은 이 책이 지구 생물체의 발치 아래 산적한 문제들을 치열하게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초입에서 독자는 어리둥절 정신없이 표류하지만, 읽는 동안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언제부터 접촉했습니까(’해파리’)’와 같은 질문 역시 심상치 않다. 놓친 것에 대한 두려움조차 생략하고 사는 둔감 시대를 겨냥하는 말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