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로버트 코람 지음|김진용 옮김|플래닛미디어|640쪽|2만9800원
영화 ‘탑건: 매버릭’에는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 매버릭(톰 크루즈)이 젊은 파일럿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해군 최고 실력을 자부하며 우쭐대던 파일럿들은 매버릭의 조준선에 속속 걸려들고 벌칙으로 팔굽혀펴기를 한다.
‘탑건’ 측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적은 없지만 이 장면은 존 보이드(1927~1997)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미 공군 파일럿이었던 보이드는 1950년대 전투기 교관 시절 ‘40초 보이드’로 불렸다. 어떤 상대도 공중전에서 40초 안에 제압하면서 얻은 별명이었다.
보이드는 뛰어난 파일럿이었고, F-16을 비롯한 전투기 설계에 영향을 미친 이론가였으며, 미국의 걸프전 승리에 기여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그의 업적 대부분이 기밀이었고 그가 저서 아닌 브리핑으로 자신의 생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가 주변 인물 인터뷰 등을 통해 그 삶을 추적했다.
◇조종사, 이론가, 전략가
6·25전쟁 이후 미 공군은 미사일·폭격기 만능주의에 빠져 있었다. 전투기들이 벌이는 근접 공중전은 구식 취급을 받았다. 조종사의 직관에 의존하던 공중전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보이드의 접근도 주목받지 못했다. 군의 지원을 받아 조지아 공대에서 산업공학 학위를 받은 보이드는 포기하지 않고 ‘에너지-기동성 이론’을 정립했다. 속도만 따지던 전투기의 기동성을 위치·운동에너지로 정량화해 평가할 수 있는 혁신적 이론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연구한 ‘무허가 프로젝트’일 뿐이었다.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본 것은 베트남전 시기였다. 기관총 없이 ‘크고 강력한’ 미사일로만 무장한 미군 전투기(F-4 팬텀)는 날렵한 미그기와의 근접전에서 고전했다. 공군은 민첩한 전투기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보이드는 1966년 펜타곤으로 전속해 경량 전투기 설계 사업에 참여했다. 이때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탄생한 전투기가 F-16이다. 보이드가 애초에 원한 것처럼 경량화를 위해 레이더까지 생략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F-16은 가볍고 빠르면서도 강력했다. 지금까지 약 4500대 생산된 현역 전투기 최고 베스트셀러. 한국 공군도 현재 160여 대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다.
전역 후 보이드는 방산 업체의 거액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전략가로 변신했다. 영문 번역자가 각각 다른 손자병법 7종을 밑줄 쳐 가며 읽고, 동서고금의 전투를 분석하며 수적으로 열세인 군대가 어떻게 이겼는지 연구했다. 결론은 기동전(機動戰)이었다.
그가 주장한 전투기 이론처럼 기동전 역시 정면 대결을 추구하던 미군에서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번엔 이라크전에서 유효성이 증명됐다. 보이드는 군사고문으로 딕 체니 국방장관을 보좌했다. 초기 계획은 이라크 육군 주력을 정면에서 공격해 힘 대 힘으로 맞붙는 소모전이었다. 이후 계획은 해병대가 상륙전으로 이라크 육군의 이목을 끄는 사이 육군이 사막을 우회해 측면을 공격하는 ‘레프트 훅 작전’으로 수정됐다. 체니 국방장관은 군 경력이 없는 민간인 출신이었지만 이 시기에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딕 체니는 보이드와 일대일로 많은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옹고집 4성 장군조차도 (기존 계획을) 재고하게 만들 정도로 군사 지식이 풍부했다.”
◇될 것인가, 할 것인가
보이드는 결점도 많은 인물이었다. 외골수인 데다 가족에게 소홀했고 “사창가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처럼” 입이 걸었다.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상급자라 해도 거침없이 모욕해 적이 많았다. 장교로 복무하면서 받은 근무 평정 중에는 경력이 위태로워질 만한 혹평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보이드를 높이 평가한 ‘어느 장군’들이 나타나준 덕에 쫓겨나지 않고 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저자는 당시의 미군(공군)을 출세주의자들이 장악한 관료제 조직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그 안에도 보이드를 부적응자 취급하지 않고 혁신적 생각을 알아본 눈들이 있었다. 공군에서 투쟁하듯 연구를 밀고 나간 보이드의 삶은 역설적으로 미군의 힘이 소수 의견도 과감하게 채택하는 유연성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군은 ‘복장 불량’의 일개 영관급 장교가 수뇌부 방침과 전혀 다른 이론을 펼칠 때 과연 용인할 수 있을까?
24년 복무하고 전역할 때 최종 계급은 대령이었다. 역시 ‘35년 차 만년 대령(captain)’인 매버릭을 연상시키는 대목. 극중 매버릭은 “별을 달고도 남았을 경력을 가지고 왜 아직 대령이냐”는 장군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지만 보이드는 자신의 군 생활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되느냐, 하느냐(To Be or to Do)”. 진급에 목 매지 않고 끝까지 갔던 ‘전투기 마피아의 대부’다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