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

폴 록하트 지음|이수영 옮김|레드리버|608쪽|4만8000원

1522년 4월 27일, 이탈리아 밀라노 인근 평원. 장창으로 무장한 스위스 용병대가 신성 로마 제국 동맹군을 향해 돌진했다. 프랑스군에게 고용된 이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평가받았다. 창병들이 맹렬한 기세로 상대 진영 300m 앞까지 접근한 순간, 동맹군의 화승총 부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흰 연기 속 비명이 요란했다. 포연이 걷히자, 도랑에 널브러진 스위스 용병대 3000명의 시신이 드러났다. 13세기경 중국에서 유럽에 전해진 화약. 그동안 제한적으로만 쓰였던 총포의 위력을 전 유럽이 알게 된 사건이었다.

화승총∙기관총∙함포…. 미국 역사학자인 저자는 16세기부터 본격화된 국가 간 ‘화력 경쟁’을 통해 전쟁의 모습과 인류 사회의 변화 과정을 설명한다. 유럽의 근대화 역시 이 ‘검은 가루’ 덕분에 앞당겨졌다. 거대한 대포 앞에선 단단한 성채도 쓸모가 없어졌고, 귀족들이 맡았던 기병은 보조적 역할로 밀려나며 지방 귀족들은 점차 권력 기반을 잃었다. 대포의 발전은 전쟁뿐 아니라 국가 행정 시스템도 바꿔놓았다는 것이 저자의 말. “대포의 발전은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 비용을 필요로 했고,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강력한 관료주의를 자랑하는 중앙집권 국가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