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지음|휴머니스트|392쪽|2만1000원


“성범죄 사건에 대한 감형 목적의 후원금을 받지 않습니다!”(한국여성민우회) “그런 후원금은 받지 않습니다. 그런 ‘감형’도 안 됩니다”(한국여성의전화), “앗! 가해자 감형 목적 후원 시도 벌써 6건 돌파? 정신 번쩍 차리고 진짜 반성을 해라”(한국성폭력상담소)….

국내 여성 단체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계정 등에 게시된 문구다. 요즘 여성 단체들은 후원의 ‘진정성’을 가려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성범죄 피의자들이 감형 목적으로 여성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김보화(43) 젠더폭력연구소장은 저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 “성범죄 집행유예 기준의 주요 참작 사유 중 하나가 ‘진지한 반성’이기 때문에 피의자들은 여성 단체를 후원하고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받아 재판부에 제출한다”고 말한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2006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에서 피해자 상담 지원 일을 해 온 김 소장의 2021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책. 성폭력 피해자, 변호사, 여성주의 활동가 등을 인터뷰하고 사례와 학술 자료 등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기자와 만난 김 소장은 “2018년 ‘미투 운동’과 2020년 ‘n번방 사건’ 이후 성범죄 피의자들의 여성 단체 후원 움직임이 가속화됐고, 배경에는 이를 부추기는 성범죄 전문 로펌들이 있다”고 말했다.

김보화 소장은 “성범죄 변호 시장은 ‘진정한 반성’ 같은 애매한 감형 요건을 파고들어 성업한다”고 했다. 그의 뒤편에 기부를 통한 감형에 저항하는 한 여성 단체의 캐치프레이즈가 걸려 있다. /박상훈 기자

형을 살 위기에 처하자 갑자기 후원을 시작하는 것을 ‘진지한 반성’이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실제로 법원이 이를 감형의 근거로 적시한 판례가 여럿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선고된 하급심 성범죄 판결 137건 중 3분의 1이 피고인의 반성 및 뉘우침을 양형 요소로 고려했다.

2009년 로스쿨 제도 도입 이후 경쟁이 치열해진 변호사 시장은 성범죄 피의자를 주 고객으로 하는 ‘성범죄 전문 로펌’의 양산을 낳는다. 김 소장은 “경력이 일천한 변호사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성범죄”라고 말한다. 성범죄와 이혼에서만은 ‘아는 변호사’가 아니라 ‘면식 없는 변호사’가 선호되기 때문. 그러다 보니 성범죄 전문 로펌들이 온라인 광고 등을 통해 반성문, 탄원서, 심리 교육 수료증 등으로 구성된 각종 ‘감형 패키지’를 제시하고 역고소를 부추기는 등 변호사의 윤리 의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호객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피의자는 변호받을 권리가 있고, 의뢰인을 감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변호사의 직업 속성이다. 그러나 김 소장은 “성폭력과 함께 강력 범죄로 언급되는 살인·강도·방화 피의자를 대상으로 한 홍보는 매우 드물지만 성폭력의 경우 유독 많다. 이 점이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의 법적 위치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는 통념, 무고에 대한 의심, 재판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특징 등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 피의자 변호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다른 사건보다 많다”는 것. “성범죄 전담 변호사들은 유튜브 등에서 가해자 감형과 승소 전략을 마치 ‘1타 강사처럼’ 알려주며 자신의 법인을 홍보한다. 이러한 ‘시장화’가 성범죄는 사소한 것이며, 돈만 주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 쓴 김보화 젠더폭력연구소장이 16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 본사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김 소장은 “로펌들이 주도해 온라인상에 성범죄 피의자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기존 커뮤니티를 사들여 홍보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유죄판결을 받고 취업 제한 상태에 있는 성범죄 가해자들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해 소송 관련 자필 후기 등을 쓰게 하며 법인 홍보 인력으로 삼는다.”

해결책은 있을까. 김 소장은 “미국·영국·일본 같은 선진국들이 좀 더 공공적이고 윤리적 가치를 담보하기 위해 시행하는 ‘형사 공공 변호인 제도’를 도입해 피의자들이 좀 더 질 좋은 변호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면 성범죄 변호 시장을 개선하는 데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라 말한다. ‘형사 공공 변호인 제도’는 변호사를 공무원으로 고용해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피의자들이 초동 수사 단계에서도 경륜 있는 변호사들에게 무료로 변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보수가 낮아 기피 대상이 되면서 저연차 변호사들의 훈련 과정 정도로 여겨지는 현재의 국선변호사 시스템만으로는 성범죄 변호의 ‘시장화’를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변협 차원에서 법조 윤리 위반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법조인들의 성인지 감수성 훈련도 필요하다. 한 성폭력 피해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 ‘일단 사법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면 가해자 1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사법 시스템 안의 온갖 위치에 있는 남성들과 싸우는 거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