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소셜미디어가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민주주의가 ‘종말’을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다.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아랍권 국가로 퍼져나간 반정부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이 일 때였다. 작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이자, 2012년 필리핀의 탐사보도 전문 매체 ‘래플러(Rappler)’를 설립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59)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 출범 이후, 그는 페이스북(메타)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정권 지지자들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으며 온라인 플랫폼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됐다.
그는 이번 신간 회고록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북하우스)를 통해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 등의 기술 발전이 어떻게 민주사회에 위협이 되는지를 세밀히 기록했다. 작년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며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했다. 래플러를 이끌며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정책과 부패 문제를 추적해 온 그를 16일 줌 인터뷰로 만났다.
마리아 레사는 36년 차 베테랑 저널리스트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1980년대 후반 고국으로 돌아와 CNN 동남아 지국에서 처음 기자 일을 시작했다. 90년대 동남아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쿠데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에선 31년간 철권 통치를 이어갔던 수하르토가 실각한 뒤 수천 명이 죽고 다치는 인종∙종교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시신을 봤던 당시보다 지금 상황이 기자로서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다. “언론 환경을 놓고 본다면, 수십 년간의 기자 생활 중 지금이 가장 좋지 않죠. 90년대에는 언론의 ‘게이트키퍼’ 역할이 작동했습니다. 대중은 언론사들이 전달하는 검증된 정보를 얻었지만, 지금은 소셜미디어 때문에 그 기반이 완전히 바뀌었죠.” 그는 책에서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천 갈래로 찢어놨다”고 표현했다. “조회수를 노린 ‘나쁜 기사’가 좋은 기사를 압도하는 상황이 민주주의를 악화시켰습니다.”
좋은 기사가 사장(死藏)되는 상황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2016년 래플러가 “두테르테의 ‘범죄와의 전쟁’이 지나친 사상자를 낳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곧 지지자들의 테러가 이어졌다. “정부의 표적이 된 후에는 길을 걸을 때도 방탄조끼를 입고 다닙니다.” 두테르테가 대중 연설을 통해 래플러를 비난하면, 지지자들이 래플러에 대한 허위 사실과 음모론을 유포하는 등 조직적으로 온∙오프라인 공격을 가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저를 ‘두테르테를 비난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정책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것이죠. 단순히 ‘몇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는,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두테르테 정권이 벌인 ‘초법적 처형’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2만7000명으로 추정된다.
마리아 레사는 두테르테 정부의 실정(失政)을 밝히는 기사를 쓴 뒤 대통령궁 출입이 금지됐고,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수많은 소송에 휘말려있다. 그에게 구형된 형량을 합치면 100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그는 언론인이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신입 기자 시절, 3개월 마다 거처를 옮겨야 했을 정도로 일만 하고 살았죠. 하지만 제가 기자의 삶을 ‘택한’ 것은 취재가 곧 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간 절망적인 상황을 봐 왔지만, 그 속에서 많은 희망도 보았습니다.”
소셜미디어의 가짜 뉴스에 대해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더욱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필리핀의 일이 모두의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치적 지도자의 외압만이 아니라, 거짓 정보와 선정적인 소식만을 담은 ‘나쁜 기사’가 이익을 보는 뉴스 소비 행태가 언론 환경을 왜곡한다는 것. “포털에서 주로 뉴스를 소비하는 한국 역시 좋은 기사가 보상을 받기 어려운 구조로 알고 있습니다. 조회수를 통해 수익이 창출되는 환경에서는, 언제든 선동적인 뉴스가 우세해질 수 있죠.” 래플러를 이끌 차기 지도자를 물색하고 있는 베테랑 저널리스트는, 여전히 초년병다운 활기를 보이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기자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순간 민주주의도 없어지죠. 수십 년간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널리즘의 질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