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리네 마르살은 스웨덴 언론인이며 저술가다. 전작인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무척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시대가 변해서 ‘국부론’ 때와는 달리 밥도 하고, 육아도 하는 경제학자들도 점점 늘어난다. 옐런 미 재무장관의 남편 조지 애컬로프가 대표적인 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그가 가사 노동을 중요하게 반분하고, 아내의 사회적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을 옐런이 한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마르살의 ‘지구를 구할 여자들’(부키) 은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과학기술사를 돌아본다. 전기차가 20세기 초반에 이미 등장했다가 사장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여성성과 결부되면서 벌어진 산업적 구조 조정이라는 사실은 나도 처음 알았다. 흑인 여성 수학자들이 NASA의 초기 프로젝트에 저임금과 차별에 시달리면서 일했던 일은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천문학 초기에 망원경으로 별의 위치를 매일 밤 기록하던 사람들도 여성 천문학자라고 알고 있다. 생각보다 젠더 문제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우리는 ‘가정·가사’라고 가르친 학문이 미국에서 ‘가정 경제(home economy)’라는 용어로 발전하는 데에도 젠더 분업과 마초 시대의 영향이 컸었다.
과학사는 늘 시대에 대한 통찰을 주는 재미가 있다. 이 책도 그렇다. 인공지능에 대한 분석은 통렬하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아직 인간 같은 기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인간을 기계처럼 부렸다. 그리고 이를 혁신이라 불렀다.” AI 알고리즘과 ‘긱 이코노미(임시직 선호 경제)’가 연결돼 만들어지는 비인간적인 촌극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농업에 왜 로봇이 전면화되지 않는가? 로봇의 가격이 노인과 저임금 외국인으로 진행되는 한국 농업의 참담한 현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지구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자는 얘기도 너무 재밌었다. 이거야말로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아먹는 데만 익숙한 남성 편의적 시선 아닌가?
초기 백화점이 여성이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는 얘기는 지금도 여성들이 혼자 돌아다니기 편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잠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상적 서사의 편안함을 살짝 뒤집어보게 만드는 이런 책들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 정의를 수호한다는 ‘칼잡이’들이 지도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사회의 여성은 존중받지 못하며, 안전하지도 않다. 이런 나라에서 지구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