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동교동에서 열린 '2022 그림책 더미 데이' 행사 참가자들이 전시 중인 신인 그림책 작가들의 수작업 가제본 책 '더미 북(dummy book)'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그림책 출판사 29곳의 전문 편집자 50명이 각자의 더미 북을 들고 온 신인 작가 130여 명과 만나 의견을 나누고 출판 기회를 타진했다. /남강호 기자

“내 마음에 들 만큼 미팅의 결실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오늘은 기회의 씨앗을 챙겨 가는 날입니다.”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 동교동’에서 열린 ‘2022 그림책 더미(dummy) 데이’ 행사. 주최자인 그림책협회 이영경 회장의 인사말에 그림책 출판사 29곳의 편집자 50명과 잔뜩 긴장했던 신인 작가 130여 명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작가들은 저마다 공들여 만든 가제본 수작업 책 ‘더미 북(dummy book)’을 들고 왔다.

우리나라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백희나(50),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48)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많은 그림책 강국. 신인 작가가 자기와 맞는 출판사를 만날 수 있도록 매칭해주는 대규모 전시·합평 자리는 이날 행사가 처음이었다.

유명 작가들도 첫 시작은 ‘더미 북’이었다. 이수지 작가가 영국 유학 시절 만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더미 북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9명이 함께 살던 런던 숙소 벽난로에 무대를 꾸미고 직접 사진을 찍어 가며 더미 북을 만들었다. 무작정 찾아간 이탈리아 볼로냐 도서전에서 그의 책을 알아봐준 출판사를 만났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작가 이수지의 시작을 알린 이 책은 지금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서울 이촌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그림책 ‘이상한 엄마’의 선녀와 엄마 등 자신이 직접 만든 캐릭터를 선보인 백희나 작가. 2016년 4월 사진. /장련성 기자.
지난 3월 서울 광장구 작업실에서 만난 이수지 작가. 일주일 뒤 작가는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의 한국 첫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에게도 작가로서의 첫 시작은 '더미 북'이었다. /사진=이태훈 기자, 일러스트=김현국 기자

이날 나온 신인 작가들은 갓 스무살부터 환갑까지 나이도 다양했다. 더미 북 역시 반전지부터 어린아이 손바닥 정도까지 크기도 저마다 다르고, 동그랗거나 길쭉하거나 얇거나 두꺼운 생김새와 재료도 제각각이다.

백희나 작가의 ‘연이와 버들도령’ 등 주목받는 책들을 펴내온 출판사 ‘책읽는곰’ 테이블에선 따뜻한 차로 새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그려온 작가가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글 없는 그림책도 탄탄한 이야기가 중요하죠. 서사의 밑그림 위에 그림을 구성해 나가는 접근 방식이 훌륭합니다. 매력적 작품인데,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느낌이 드네요. 색깔을 한 번 더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격려와 조언에 신인 작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핑거’ 출판사 곽재정 편집장과 이야기 나누던 옥희진(42) 작가는 2020년 그림책 ‘너에게’(노란상상)를 펴낸 적이 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나올까 말까’ ‘내가 준비가 됐나’ ‘괜히 남의 귀한 시간만 뺏는게 아닐까’ 생각하며 망설였다. 실패라도 빨리 해보자 싶어 용기를 냈는데 막상 이야기 나눠보니 배우는 게 정말 많다. 나오길 잘했다 싶다”며 웃었다. 곽 편집장은 “메일로 주고받는 것보다 직접 만나 설명을 듣고 원화를 보니 작가의 생각과 의도가 더 확실히 잡힌다”며 “아직 세 명 만났을 뿐인데 굉장히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었다”고 기뻐했다.

21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 동교동에서 열린 ‘2022 그림책 더미 데이’행사에서 옥희진(오른쪽) 작가가 핑거 출판사 곽재정(왼쪽) 편집장과 자신의 그림책을 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행사 실무를 총괄한 김상일 그림책협회 출판사분과장(키다리 출판사 대표)는 “200명 넘는 작가가 지원했는데 시간과 장소가 한정돼 있어 130명밖에 모시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이날 참여 작가 최연장자 이재옥(59)씨는 “프로 전업주부 38년 차”이자, 작년 ‘나비가 하나둘셋’(봄봄)을 펴낸 그림책 작가. 이날은 손자와 강아지 두 마리의 추억 이야기, 올해 서른인 막내의 고단한 직장 생활을 위로하는 이야기 등 더미 북 세 권을 들고 왔다. “그림책은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그림이 아름다운 데다 오감으로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어요.”

이날 작가들은 최소 4회에서 최대 6회까지 다양한 성향의 출판사 편집자를 독대해 자신을 알릴 기회를 얻었다. 출판사들의 ‘제2의 백희나, 이수지’ 탐색은 총 22회씩 미팅을 소화하며 오후 내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