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게임 | 러쉬 도시 지음 | 박민희·황준범 옮김 | 생각의힘 | 632쪽 | 2만7000원

1997년 10월, 흰색 버튼다운 셔츠와 노란색 노스페이스 스키 재킷을 차려 입은 홍콩 사업가 쉬쩡핑(徐增平)이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나타났다. “만들다 만 항공모함이 하나 있다면서요? 그걸 마카오로 가져가서 수상 카지노를 만들고 싶어요.” 수백만달러 뇌물을 펑펑 쓰고 밤이면 고급 이과두주를 풀어 놓는 그를 보고 모두들 괴짜 졸부겠거니 생각했다.

사실 쉬쩡핑은 흑해에 방치된 소련제 미완성 항모 바랴그(Varyag)를 구매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비밀리에 동원한 인물이었다. 바랴그는 2002년 다롄으로 옮겨졌고, 중국은 쉬가 함께 가져온 청사진과 엔진을 활용해 2009년부터 배를 개조, 2012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호로 취역시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항공모함 제작 준비를 다 갖춰 놓은 중국은 왜 7년을 허송세월했던 것일까. 이 책(원제 ‘The Long Game’)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중국의 대전략(大戰略)이 2008년을 기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전 ‘대전략 1단계’ 시절에는 항공모함처럼 비용이 많이 들고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무기 개발을 일부러 자제했다는 것이다.

최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직후 중국은 대만 주변 해역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전에 없이 고조되는 미·중 갈등 앞에서 많은 사람은 ‘시진핑이 왜 저렇게 호전적인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브루킹스연구소 출신으로 현재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 담당 국장을 맡고 있는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공세는 ‘시진핑 훨씬 이전부터 계획된 거대한 그림의 일부’다.

지난달 29일 홍콩의 쇼핑몰에서 한 시민이 전날 있었던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전화 회담 뉴스를 보고 있다. 미·중 두 정상은 2시간쯤 통화했으나 대만 문제로 충돌했다. '롱 게임' 저자는 최근 미·중 갈등이 미국을 대신해 초강대국이 되려는 중국의 '대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 대전략은 완성된 문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중국 정부와 당의 문서, 고위 관리들의 연설과 회고록, 유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분석해 낸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을 대체하는 초강대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중국의 장기 계획이다.

대전략의 1단계는 1989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도광양회(韜光養晦·능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의 시기다. 톈안먼 사태, 걸프전, 소련 붕괴를 겪으며 중국 지도부는 미국을 직접적 위협으로 인식하게 됐고, 드러나지 않은 채 미국의 예봉을 꺾는 ‘약화시키기(blunt)’ 전략을 썼다. 항공모함 대신 미 군사력의 접근을 막는 기뢰와 잠수함 등을 집중 개발했으며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해 미국이 중국의 무역상 최혜국 지위를 건드리는 것을 막았다.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이 되자 중국의 눈에 미국이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고, 이듬해 대전략의 2단계가 시작됐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를 교체한 ‘유소작위(有所作爲·무언가를 성취함)’를 천명했다. 이번 전략은 ‘구축하기(build)’였다. 항공모함을 건조해 적극적인 해양 통제에 나서는 한편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패권 구축에 나섰다. 2016년 한국의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맞서 보복 조치를 취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2017년, 중국의 대전략은 3단계에 진입했다. ‘미국과 유럽이 명백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는 중국의 판단은 이후 서방 세계의 코로나19 대응을 보며 더욱 굳어졌다. ‘100년 만의 대변동’을 선언한 시진핑은 노골적인 ‘확장’ 전략으로 나아갔다. 글로벌 거버넌스와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할 의지를 숨기지 않고, 아프리카와 북극에까지 군사기지를 건설해 미국을 압도하려 하고 있다.

결국 공산당 출범 100주년인 2049년을 목표로 삼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꿈(중국몽)은 세계의 유일 패권국이 되겠다는 중국의 욕망이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철수한 미국이 ‘원자재, 부동산, 관광, 다국적 조세 회피에 특화된, 영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 나라’ 정도로 쇠퇴하리라는 기대까지 숨기지 않는다.

중국은 나치 독일, 일본, 소련도 닿지 못했던 미국 GDP(국내총생산)의 60% 문턱을 2014년 넘었고, 상품 가격을 비교해 환산하면 경제 규모에서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아직은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중국의 군사력에 대해서도 저자는 ‘무시해선 안 되는 중요한 도전’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패권주의, 권위주의와 독재, 인권 탄압, 국제적 약속 위반, 그리고 자유주의 가치의 훼손이라는 면에서 중국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