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없다|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정해영 옮김|메멘토|600쪽|3만3000원
“자폐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입니다. 스펙트럼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자폐인은 천차만별입니다.”
자폐인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당신이 자폐인이니 자폐가 있는 의뢰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선배 변호사에게 우영우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 다 다르듯 자폐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자폐인이 자폐인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라는 것이다.
정신보건을 연구하는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61) 조지워싱턴대학 교수가 쓴 이 책의 주제는 우영우의 말과 맞닿아 있다.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은 자폐증을 비롯한 일부 정신질환의 특성을 ‘장애’가 아닌 인간 다양성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도입됐다. “정신질환은 단일한 ‘현상’이 아닌 하나의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는 ‘정도’의 문제이며, 결국 소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한 끗 차이”라는 주장이다.
자폐증,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조현병 등을 겪는 사람과 그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낙인’을 주제로 삼은 이 책에서 그린커는 특히 자폐증에 초점을 맞춘다. 맏딸 이저벨이 자폐인인 영향이 크다. 1960년대만 해도 의사들은 자폐증을 형편 없는 양육 탓으로 돌렸다. 자폐아를 둔 어머니에게는 냉담하고 가학적인 ‘냉장고 엄마’라는 낙인이 찍혔다. ‘냉장고 엄마’라는 말을 만든 정신분석가 브루노 베텔하임은 ‘어머니의 검은 젖’으로부터 자폐아를 분리하려고 보호시설에 보냈다.
그렇지만 자폐증에 대한 ‘낙인’은 적어도 현재 미국에서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고 그린커는 말한다. 자폐증이 좁은 의미의 ‘장애’에서 더 넓은 의미의 ‘스펙트럼’으로 확대된 영향도 있고, 자폐증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한 비난은 감소한 영향도 있다. 그린커는 “지난 20년간 미국 공립학교 특수교육 프로그램에 소속된 학생들의 비율은 동일하게 유지되었지만 자폐증 범주의 진단을 받은 아이들은 세 배로 늘었다”고 말한다. 자폐증이 덜 무섭고 덜 치욕스러운 진단이 되면서 자폐 특성이 있더라도 예전 같으면 다른 진단을 받았을 아이들의 부모까지도 자녀가 자폐 진단을 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한국계인 그린커는 자폐증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2006~2011년 한국에서 5만 명 넘는 아동을 대상으로 자폐증 역학 조사를 벌였다. “내가 인터뷰한 많은 한국인 부모는 자폐증의 유전적 원인이 상당하다고, 즉 유전력이 높을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유전력’은 ‘유전됨’ 또는 ‘집안 내력’과 같지 않다.” 자폐증 사례의 상당 부분은 신생 돌연변이가 원인이지만 그린커가 한국에서 인터뷰한 부모들은 이를 가족의 혈통 전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봤다. “’유전적’이 유전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과연 누가 유전적 장애가 있는 집안과 사돈이 되겠느냐고 어머니들은 묻는다. 그 결과, 부모들은 종종 자폐증 진단을 거부하고 그 대신 유전적 부담이 적은 ‘반응성 애착장애(RAD)’라는 진단을 받으려고 한다.” RAD는 학대당한 아동들이 많이 보이는 증상. “본인이 잘못된 양육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감수함으로써 나머지 가족을 유전적 이상이라는 생물학적 낙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다.”
2008년 서울에서 그린커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인류학적 관점에서 자폐증 치료를 바라본 ‘낯설지 않은 아이들’을 출간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학자들의 목표는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자폐증을 앓는 아이들이 덜 낯설어질수록 그들이 더 살아가기 쉽도록 세상이 바뀐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아내가 모두 정신과 의사인 그린커는 이번 책에서 정신질환자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 믿은 증조할아버지의 사례 등을 바탕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펼쳐낸다. 사적인 가족사가 이 책의 연구서로서의 가치를 폄훼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허들을 낮추도록 부드럽게 안내한다.
책의 끝 부분에서 그린커는 “공개는 낙인을 지우는 반면 은폐는 낙인을 만든다”면서 딸 이저벨 이야기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졸업 연설을 맡은 이저벨이 “제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들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입을 열었을 때, 어떤 청중은 웃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이들은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의 특이한 리듬에 놀라며 수군댔다. 그러나 이저벨이 ‘저처럼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은’이라 말하는 순간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 졌다. “이제 청중은 이저벨을 이해하고 그녀가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대로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보이던 것이 갑자기 이해되었다. 이저벨은 기립 박수를 받았다.” 원제 Nobody’s Nor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