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마틴 래디 지음|박수철 옮김|까치|579쪽|3만원
푸틴의 야망과 좌절|김영호 외 3인 지음|글통|256쪽|2만원
신간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 “합스부르크는 해가 지지 않는 최초의 제국”이란 문장을 읽고 영토 사이의 거리를 지도에서 쟀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서쪽 끝 멕시코, 동쪽 끝 필리핀까지 점으로 이어진 영토의 거리가 지구 둘레의 60%를 넘었다. 영국보다 400년 앞서 제국의 밤을 몰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좌우명은 ‘더 멀리’다.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엔 태평양이 있을 뿐이다. 멀리 가다가 육지를 한 바퀴 돈 것이다.
이런 제국을 한 왕조가 약 800년 동안 유지했다면 수많은 영웅이 나왔을 법하지만 실제론 적다. 생존과 생식 양면에서 기적적인 능력을 보여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정도가 그나마 세상에 알려진 영웅이다. 반면 광남(狂男)과 광녀(狂女)는 한 세대가 멀다 하고 태어났다. 절름발이 알프레히트, 광녀 후아나, 광인왕 카를로스 등 장애를 비꼬는 군주의 별명이 유난히 많다. 엽기적 토막 살인마 황태자도 나왔다. 스페인계 왕자 돈 카를로스는 광인 행각으로 베르디 오페라의 주인공까지 됐다. 당대 최고의 위생, 풍부한 영양 혜택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유아 사망률은 한때 국민 평균보다 4배 높은 80%를 기록했다. 근친혼에 따른 유전 질환인 ‘취약 X 증후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인 저자는 20세기까지 이어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광과 저주를 동전의 양면으로 파악한다. 합스부르크는 혼맥만으로 스페인과 그들의 광대한 식민지, 헝가리와 체코, 러시아를 제외한 동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다. 최대한 후계를 생산한 뒤 때를 기다리다가 혈통이 끊어진 사돈집을 날로 먹었다. 이렇게 확대한 지배권을 통합하기 위해선 근친혼을 통해 피의 순수성을 지켜야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에 유전병은 제국 유지를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개념엔 보편성이 담겨 있다”고 했다. 제국의 심장인 오스트리아 빈의 제국 도서관 천장에는 세 여신이 ‘AEIOU(세상 모든 땅은 오스트리아 것)’라고 적힌 깃발을 든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일반론 외에 300개의 다른 해석이 이 말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정치 권력의 강제에 근거한 세속적 지배력”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 관대함, 명성, 웅대함, 확고함 같은 미덕, 그리고 계몽주의”가 개념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로마에서 원류를 찾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는 순간 문명의 보편성이 사라지고 싸구려 민족주의가 유럽을 메웠다는 것이다. 자극적 풍자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이 책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다. 저자가 영국 교수이기 때문인지 결론부에선 제국주의의 차별적 냄새도 약간 풍긴다.
일부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풍부한 지식이 농축된 엑기스 같은 책이 분명하다. 제국을 찢어 놓은 동유럽의 지독한 민족 분열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체코인은 단추 달린 상의로, 슬로베니아인은 겨울잠쥐 모피로, 헝가리인은 콧수염으로 소속의 차이를 나타냈다. 어느 관찰자는 헝가리인의 콧수염을 23개로 분류했는데 각각의 형태는 그들이 헝가리와 얼마나 밀접한지를 차등적으로 보여줬다.” 책을 읽는 동안 재미있는 나무로 가득 찬 숲속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나무 사이를 헤매다 길을 잃어 종종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디테일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합스부르크 이후 영국과 함께 러시아도 해가 지지 않는 땅을 지배했다. 두 제국의 끝과 끝에 우크라이나가 있었다. 이 책을 요즘 탈고했다면 저자는 우크라이나 비극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서로마적 보편성과 러시아 제국의 동로마적 전제성의 충돌로 해석하는 내용을 추가했을 듯하다. 결은 다르지만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신간이 한국 연구자 4명이 쓴 ‘푸틴의 야망과 좌절’이다. 저자는 러시아의 맹목적 영토욕과 푸틴의 다가올 미래를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비유한다.
“파홈이란 농부는 어느 날, 우연히 땅값이 ‘하루 치’라는 희한한 얘기를 듣는다. 천 루블을 내고 하루만큼 걸어서 둘레를 정하면 그 땅이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다. 파홈은 온종일 뙤약볕에 뛰고 걷고 기다시피 하여 결국은 돌아왔지만 죽음에 이른다. 결국 그가 얻은 땅은 죽어서 들어간 관 하나의 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