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박서련 지음|창비|208쪽|1만4000원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봤다. TV에서 이런 ‘마법소녀’를 본 적 있던가. 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의 주인공은 서울 마포구에 사는 스물아홉 살 백수 여성이다. 전염병이 퍼지며 직장을 잃고 300만원 카드빚을 못 갚아 허덕인다. 결국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고달픈 생을 끝내려던 순간 ‘아로아’란 마법소녀가 나타나 말한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

이 말에 홀딱 넘어가 아로아를 따라나선 주인공은 곧 TV 속 만능 미소녀인 마법소녀와는 거리 먼 자신에게 좌절한다. 평범한 외모에 능력도 발휘하지 못해 다른 이에게 비웃음을 산다. 나름 마법소녀의 상징인 ‘요술봉’도 얻는데 하필 그 모양이 신용카드. 주인공은 ‘카드빚에 시달리더니 요술봉도 카드냐’며 부끄러워한다.

그래도 이 신용카드가 결국 ‘기후변화’와 이를 악용해 세상을 망하게 하려는 ‘시간의 마법소녀’를 물리친다. 그 와중에 ‘결국 세상을 구한다’는 기존 마법소녀의 성장 서사만큼은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한다. 한편으론 지극히 현실적인 마법소녀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선 초인적 능력으로 도심을 파괴하는 괴물보다 자연재해가 더 두렵고, 반짝거리는 요술봉보단 신용카드가 더 만능 같기 때문이다.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 2021년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한 작가는 마법소녀 만화를 보며 자란 1989년생이다. 자신을 10대엔 IMF를, 20대엔 세월호 사건을 겪었고, 호황의 순간은 한순간도 없던 세대라 말한다. 그런 작가와 또래들에게 기후변화, 청년빈곤은 익숙한 현실이자 마법소녀라도 되어야 해결할 만큼 어려운 문제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짠 내 나지만 세상을 구할 신용카드 마법소녀를 계속 기다려왔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