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
이저벨 윌커슨 지음|이경남 옮김|RHK|500쪽|2만5000원
“아프리카인들은 흑인이 아닙니다.”
몇 년 전 런던의 한 강연장에서 나이지리아인 극작가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그보우(부족 이름)이고 요루바이고 에웨이고 아칸이고 은데벨레입니다. 그게 그들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이고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와서 흑인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깨닫는다. “보이는 모습에 따라 인간을 분류하고, 대비되는 특징으로만 정체가 정해지고, 인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근거 삼아 사람들을 서열화한 것. 이는 모두 신대륙을 형성하고 신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제작자의 요구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과정을 통해 정해진 배역에 캐스팅되었다.”
저자 이저벨 윌커슨(61)은 뉴욕타임스 시카고 지국장 출신. 1994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2020년 출간한 이 책에서 ‘카스트(caste)’라는 개념을 통해 미국의 인종문제를 조명한다. ‘카스트’라는 단어는 인도의 신분제를 가리키지만 원래 ‘인종’ ‘혈통’을 뜻하는 르네상스 시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에서 유래했다. 저자는 “따라서 이는 아메리카를 창조한 서구 문화가 만들어낸 개념”이라 주장한다. 그는 백인을 ‘지배 카스트’, 흑인은 ‘하위 카스트’, 아시아계와 라틴계 등은 ‘중간 카스트’라 칭하며 논지를 풀어간다.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1959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온 불가촉천민(최하위 카스트) 친구”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
저자에 의해 카스트는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다. 그는 우선 “서열이나 지위를 근거로 상대에게 존경심이나 명예, 관심, 특권, 자원, 인간적 친절 등을 베풀거나 베풀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또 극장 좌석이 층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데 빗대어 이렇게도 말한다. “일상 속 카스트는 영화가 상영 중인 어두운 극장에서, 손전등을 바닥에 비추며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하는 말 없는 가이드와도 같다.” 카스트는 백인인 러시아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상석에 아프리카계 여성이 인사나 유머 없이 가 앉는 것을 싫어하는 일이다. 전문 기술로 회사에 큰 기여를 하지만 CEO 자리는 아예 넘볼 생각이 없는 아시아계 남성을 백인 사회가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카스트는 ‘조상’과 ‘변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이라는 두 기준으로 구분된다. 1790년 미국 의회는 법령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백인 이민자, 즉 ‘자유 백인’으로 제한했다. 앵글로 색슨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인간 공해’ 취급을 받았다. 1882년 미국은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 서부로 밀려오는 중국인들의 유입을 막으려 했다. 1910년 하원 이민귀화위원회에 나온 한 증인은 “이 나라의 대단했던 생명력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동양의 쓰레기들로 오염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일본 이민자 다카오 오자와는 웬만한 ‘백인들’보다 자신의 피부가 하얗기에 시민권을 받아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미국 대법원까지 갔는데 1922년 법원은 만장일치로 백인은 피부색이 아니라 ‘코카서스인’을 의미하며 일본인은 코카서스인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미국에 있는 백인 중 러시아 코카서스 산맥에 거주한 조상을 가진 이는 거의 없다.
저자는 미국의 카스트가 어떤 면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차별보다 더 가혹하다고 말한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 법령인 뉘른베르크 법령 초안을 만들 때 1924년의 미국 이민제한법을 모범 사례로 여겼다. 미국 우생학자들의 인종 이론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는 유대인과 독일 인간 결혼 금지법을 제정하면서 조부모 중 유대인이 3명이어야만 유대인으로 간주했다. 이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자’를 흑인으로 규정한 미 앨라배마주의 인종 간 결혼 금지령과 비교된다. 나치는 “’한 방울 규칙’이라는 미국의 가차 없는 엄정함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고 했다.
복잡하고 민감한 주제를 간명한 문장으로 설득력 있게 잘 쓴 책이다. 저자 자신이 속한 카스트 이야기를 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한다. “바이러스는 누구나 감염될 수 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단지 바이러스의 공격을 처음 받은 사람들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양이 되었다”라며 코로나 이후 만연한 아시아인 혐오 범죄까지 시야를 넓힌다. 카스트가 포악한 이유는 태어날 때 우연히 얻은 것,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다. 정치학자 앤드루 해커가 뉴욕 퀸스 칼리지의 백인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말해준다. “‘얼마의 돈을 주면 앞으로 50년을 흑인으로 살겠냐’ 묻자 학생들 대부분은 5000만달러(약 620억원)라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