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 지음|정수윤 옮김|은행나무|320쪽|1만5000원

제목에 책의 모든 것이 응축돼 있다. 영어에서 “To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누군가의 신발을 신다)”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다’라는 관용구. 저자 브래디 미카코(57)는 일본인으로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 영국에서 보육사로 일한다. 혼혈 아이를 키운 경험을 담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시리즈 두 권이 누적 판매 100만부를 기록하며 2019년 마이니치출판문화상 특별상, 서점 대상 논픽션 부문 대상 등을 받았다.

‘엠퍼시(empathy)란 무엇인가?’ 저자의 아들이 중학생 때 학교 시험에 나온 문제다. 아들이 “스스로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저자가 ‘엠퍼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탐구하는 과정이 책의 중심축을 이룬다. ‘엠퍼시’란 일본어에서도 우리말에서도 흔히 ‘공감(共感)’으로 번역된다. 사전적 정의는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 그런데 ‘심퍼시(sympathy)’ 역시 ‘공감’이라 번역된다. 사전에서는 ‘심퍼시’를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누군가의 문제를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드러냄’이라 이른다. 저자는 깨닫는다. “엠퍼시는 능력이므로 배워서 익히는 것이고, 심퍼시는 감정·행위·우정·이해처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거나 차오르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은 따스하게 보이지만 잔혹하고도 오만하다. 내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에만 이해하겠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배신’을 쓴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은 “자신을 모델로 타인을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거나, 타인에게 억지로 내 신발을 신기는 일”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인 ‘공감’ 즉 ‘심퍼시’와 지적인 훈련의 결과물인 ‘엠퍼시’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하며, 사회 구성원들에게 ‘엠퍼시’를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엠퍼시’란 누군가에게 나를 투사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이 나와는 다른 존재로서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더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상상해보는 일이다. 즉 남의 신발이 아무리 냄새나고 더럽더라도 감정적이 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그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다.

축축하고 냄새 나는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은 꺼려진다. 저자는 “이성적으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태도에서 진정한 공감이 싹튼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엠퍼시의 달인’으로 저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열의 반려였던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1903~1926)를 꼽는다. 대역죄로 투옥된 후미코는 이런 단가(短歌)를 읊는다. “짭조름하게 정어리 굽는 냄새, 여자 간수도 그리 부유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네.” 반(反)천황제를 외치는 사람 입장에서 간수는 전향을 강요하는 ‘국가의 개’다. 그렇지만 후미코는 정어리 굽는 냄새를 맡으며 간수의 소박한 삶을 상상한다. 자신의 처지와 결부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를 이해해보려 한다.

저자는 “타인을 표피로만 판단하지 않고 여러 층위의 집합체로 바라보는 것이 엠퍼시의 시작”이라 말한다. 한 예로 남성 리더는 여성 리더보다 엠퍼시 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남자다운 규범에서 탈피한 남성은 불리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엠퍼시를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는 “심퍼시적 ‘좋아요!’는 많이 누르지만 엠퍼시의 황야가 되기 쉬운 공간”이라 평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무대 앞’ 공간에서는 타인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유의 깊이와 폭 모두가 돋보이는 책이다. 성별⋅세대⋅이념을 경계로 나뉘어 혐오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 그 중에서도 당파 싸움을 일삼는 정치인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다른 집단끼리 싸워서 어느 쪽이 강한지 결정하는 약육강식 제도가 아니다. 어느 쪽이 올바른지 결정하는 싸움도 아니다. (…) 민주주의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물론 상반된 신조를 품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면서, 이런 ‘경계’의 공간에서 어디까지라면 서로 양보할 수 있을지 착실하게 탐색해보는 대화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