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제전

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최파일 옮김|글항아리|592쪽|2만9000원

1913년 5월 29일 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발레 ‘봄의 제전’의 막이 올랐다. 세르게이 댜길레프 러시아 발레단 단장이 기획하고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았다. 공연장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관객의 항의가 시작됐다. 음악에는 멜로디가 없었고, 무용수들은 우아하지 않았다. 육중하게 도약하고 쿵쿵거리며 걸었다. ‘모더니즘의 시초’로 역사에 기록된 이 작품은 태양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러시아 이교도들의 희생 제의를 표현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처음 붙인 제목은 ‘제물(victim)’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봄의 제전’이 아니라 ‘봄의 학살’이라 불렀다. 비아냥이었지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다산과 생명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제물로 바쳐진 처녀는 죽도록 춤추다 쓰러진다. 이 죽음은 애도되는 것이 아니라 ‘제의’라는 명분을 위한 희생으로 영예롭게 여겨진다. 마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에 의해 스러진 젊은 병사들처럼.

2009년 6월 런던에서 공연된 영국 국립 발레단의 ‘봄의 제전’. 에리나 다카하시(가운데 붉은색 옷)가 제물이 되는 처녀 역을 맡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라트비아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한 역사학자인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상징인 ‘봄의 제전’은 20세기 초 유럽을 지배했던 미학적 정신을 대변하는데, 이것이 양차 세계대전 발발을 추동했다”고 주장한다. 이성과 합리는 사라지고 에너지만 들끓는 ‘봄의 제전’에서처럼 전쟁의 광기가 유럽을 지배하고, 무고한 이들이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독일 작가 토마스 만과 ‘봄의 제전’을 기획한 댜길레프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만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이 댜길레프를 모델로 했다고 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놀랄 만큼 겹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를 근거로 20세기 초 유럽이 공통적인 미학적 경험을 겪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미학적 정신은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가? 저자는 “독일이 제1차대전을 일으킨 것은 민족 자체가 구세대를 뒤엎는 전위대가 되려는 아방가르드적 열망 때문”이라고 쓴다. “팍스 브리타니카와 프랑스 문명에 의해 부과된 세계질서,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명문화된 질서를 깨트리고 나오려는 욕망을 대변했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독일인은 자신들이 개입하게 된 1차 대전의 무력충돌을 ‘정신적 의미’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하나의 관념이지, 영토 확장을 노린 음모가 아니었다. 영국은 ‘영웅’이 아닌 ‘부르주아 사업가의 나라’여서 주적이 되었다. 많은 독일인이 전쟁에서 미학적 쾌락을 느꼈다. 좌파와 우파, 노동자와 부르주아가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소수민족집단, 오스트리아의 형제들과는 하나가 됐다. ‘파우스트’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협력의 광경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죽음에 직면한 적이 있고 병영 생활의 선선함과 즉각성을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민에게서 더 큰 가치를 찾을 것 같다.”

1차대전은 1918년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유럽에 드리우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나치즘은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의고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 “나치즘은 아방가르드의 대중적 변형이었다. 이성이나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자아, 감정, 경험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1차 전쟁의 경험은 아돌프 히틀러의 본보기이자 영감의 원천이 됐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화가였다. 저자는 “나치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대한 볼거리였다”면서 윤리 의식 없이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예술이 끔찍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국가 간 역학관계가 아니라 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전쟁을 들여다본 책이다. 관념적이지만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예술의 의미와 역할을 다방면으로 숙고하게 한다. 어디 봄이 아름답기만 하던가. ‘봄’은 전통적으로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지만 갈색 흙 위에서 어느 무고한 이가 살해당하고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말했다. “한 시간 만에 찾아오는 듯하고, 온 땅이 갈라지는 듯 폭발적인 러시아의 봄을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 해마다 얻은 가장 멋진 경험이었다.” 이 봄, 유럽에선 또 다른 ‘봄의 제전’이 벌어지고 있다. 원제 Rites of Spring. 곽아람 기자